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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집이 우리의 옷이 된다. 실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축약한 말이다. 실크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를 둘러싼 이야기는 실크의 질감만큼이나 신비롭게 감긴다.
일단 실크를 말하기 전 '실크'의 개념에 대해 한번 짚고 갈 필요가 있다. 실크와 관련된 용어는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일으킬 정도로 많다. 실크, 비단, 견, 명주는 모두 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같은 원단이라 봐도 큰 문제가 없다. 이 실크 원단의 재료가 되는 실이 견사다. 견사는 면사나 모나 리넨 등 인간이 가장 오랫동안 사용한 자연 섬유 중 하나다. 모와 견사는 그 중에서도 동물성 섬유다. 견사의 주인은 나방의 애벌레 상태인 누에다. 누에가 만드는 얇은 실이 견사고, 견사를 직조해 짠 직물이 실크다. 같은 직물에 대한 단어가 이렇게 많다는 사실부터가 인류와 실크의 유구한 역사를 암시하는 면이 있다.
누에의 실로부터 비단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봐도 봐도 흥미롭다. 누에는 뽕잎을 먹으며 성장한다. 40일 내내 뽕잎을 먹다가 실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그 실로 자신의 집이 될 고치를 짓기 위해서다. 인간은 그 고치를 다시 풀어내어 실로 만든다. 이게 실크의 원단인 견사다. 견사로 실크를 만드는 건 약 480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대체 그 옛날에 어떻게 ‘누에고치를 풀어 실로 만든다’는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싶을 만큼 대단한 일이다.
더 놀라운 건 실크를 만드는 과정이 기본적으로는 변한 게 없다는 점이다. AI가 편지를 써주고 온갖 화학 섬유가 인간을 더 따뜻하고 시원하게 만들어주지만 기본적으로 실크는 여전히 누에에게 뽕잎을 먹여 키워가며 토해낸 실로 만드는 자연 소재 원단이다.
다만 사람들의 생각이 변해서 이제는 실크에도 윤리 개념이 들어갈 수 있다. 실크의 전제는 누에의 죽음이다. 실크 실을 토해내어 누에가 들어가 있는 고치는, 말리거나 뜨거운 물에 넣으면 얇은 실의 형태로 다시 풀어진다. 누에 입장에서는 나방이 되기 위해 고치를 만들었는데 고치가 다 만들어지자 고치 안에서 죽게 된다. MBTI의 F라면 이 이야기를 듣고 슬퍼질지도 모른다.
여기서 '윤리적 실크'라는 21세기형 실크가 등장한다. 부화가 끝나서 성충이 되어 고치를 뚫고 나가 빈 집이 된 고치로 실크를 만든다는 논리다. 윤리적으로는 더 깔끔하겠으나 현실적으로 조금 더 복잡하다. 윤리적 실크는 고품질 실크와 양립할 수 없다. 고품질 실크를 위해서는 누에가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고급 소재의 특징에 있다.
고품질 실크의 전제는 좋은 견사다. 좋은 견사의 조건은 실의 길이다. 실크가 고급 직물인 이유도 자연 상태의 섬유 중에서는 거의 유일한 필라멘트 섬유이기 때문이다. 필라멘트 섬유는 긴 섬유 하나를 그대로 실로 짜낸 섬유다. 화학섬유계인 나일론 등도 필라멘트 섬유다. 모나 면으로 만든 실은 개념적으로 생각하면 짧은 섬유 여러 개를 모아서 길게 만든 실이다. 면사는 실 상태에서 만져도 희미한 보풀이 있는 이유다. 이렇듯 실 자체가 긴 것이 중요한데 나방이 뚫고 나간 누에고치는 구멍이 뚫려 있을 테니 그 고치를 풀어내서 실로 만들어도 실이 짧아진다. 윤리적 실크를 감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품질을 감내해야 한다. 이런 걸 보면 세상 어디에나 쟁점이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유구한 전통과 현대적 논란 사이에서 실크의 아름다움만은 여전하다. 동물성 섬유에서 나는 광택. 얇고 긴 원사를 직조해 만들었기 때문에 생겨나는 부드러움. '드레이프성이 좋다'고 일컬어지는, 축 늘어뜨려도 실크임을 바로 알 수 있는 특유의 주름. 이 모든 요소들이 모여 실크만이 가진 광택과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실크의 특징 중 하나로 '드레이프성'이 좋다는 말이 꼽힌다. 위에서 잡고 늘어뜨렸을 때 특유의 풍성한 질감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실크 역시 꾸준히 발전한다. 실크 원사인 견사에 다양한 합성섬유를 더해 실크 혼방 원단을 만드는 식이다. 견사와 면사, 견사와 리넨 등 전통적인 천연직물과 직조를 하면 코튼 실크와 리넨 실크 등의 직물이 된다. 코튼의 탄탄함과 실크의 광택이 함께 하는 매력적 혼종이다. 견사에 레이온을 더해 보통 실크보다 조금 더 저렴하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내는 원단을 만들거나, 견사에 라이크라를 더해 직물에 탄성을 줄 수도 있다. 각자의 상황과 쓰임새에 따라 실크 역시 점차 발전하는 중이다. 가장 전통적인 자연 섬유가 최신의 화학 섬유와 직조되어 오늘날의 일상에 스며든 모습을 한번 생각해보면 새삼 감탄하게 된다.
1-4) 염색과 직조에 따라 같은 실크라도 느낌이 굉장히 달라진다.
실크는 예나 지금이나 인류 역사와 은근하면서도 촘촘하게 이어져 있다. 일례로 '실크로드'의 주인공 중국은 여전히 세계 최대 규모의 실크 생산국이다. 실크 원사와 원단 모두 중국이 세계 최대 규모다. 유럽은 지역별로 산업이 발달한 곳답게 실크로 유명한 도시들이 여전히 자기 도시의 실크를 만든다. 대표적인 곳이 프랑스 리옹과 이탈리아 북부의 코모다. 리옹 실크는 에르메스 실크 스카프의 원산지라는 사실부터 왠지 그럴싸해 보이는 느낌이 든다. 이탈리아 코모는 멋진 호수와 함께 실크 생산으로도 유명하다. 유럽의 오래된 제조업은 필연적으로 작은 회사들의 연합일 때가 많은데, 코모 역시 정부와 협회의 지원을 얻은 자체 브랜드 실크를 만든다. 역사와 전통을 마케팅 포인트로 삼으며 전 세계인의 지갑을 노리는 서유럽답게 두 도시는 모두 직물과 실크에 관련된 박물관이나 여행 코스까지 운영하고 있다.
실크는 중국사와 세계사뿐 아니라 한국의 산업사와 현대사와도 연관이 있다. 한때 한국은 집집마다 누에를 키울 만큼 실크 생산에 관여하고 있었다. 특히 경상남도 진주는 한국 실크의 중심지라 할 만했다. 1960-70년대 진주에는 150여 개의 실크 업체가 성업했고, 각 업체의 종업원만 2000명에 가까웠다. 진주시 전체의 근로자 중 20% 이상이 실크 업계에 종사했던 셈이고, 진주 전역 제조업 생산액 중에서도 40% 정도를 차지하는 핵심 산업 중 하나였다. 약 50년이 지난 지금 진주 실크 산업은 2대째 운영되던 신화직물이 문을 닫을 정도로 침체했다. 한국도 이제 선진국형 고급품들이 나올 때가 되었으니 오히려 지금이 고급 실크가 태어날 기회일지도 모른다.
1)실크의 특징 중 하나는 염색과 인쇄가 잘 된다는 점이다. 다양한 문양으로 염색된 실크를 보기 쉬운 이유다.
2)같은 실크 원단에도 다양한 변수와 급수가 있다. 고급 실크 특유의 광택을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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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관찰하고 사람을 경청해 맥락을 사진에 담는 사진가입니다. 광고, 매체 등 상업 작업과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을 동시에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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