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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옷이 갖는 의미는 변하는 중이다. 건강과 조금 더 가까워졌고, 생활과 더 밀접해졌으며, 일터에서도 보다 긴밀해졌다. 옷은 더 이상 단순히 의류에 그치지 않는다. 한 개인이 구성원으로서 그가 사회에 기여하는 과정에도 영향을 끼치게 됐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바지한다는 사실 만큼이나, 이바지하는 동안 옷에서 파생되는 기분이나 편의, 일의 흐름이 중요해졌다. 일의 성격에 따라 그가 입는 의복이 달라지고 그것이 곧 그 사람의 스타일로 이어진다. 다양한 워크웨어가 복각되고 유행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거다. 시 쓰고 사진 찍는 일을 십 년간 해오면서 현장에 가지 않을 때도 내가 입는 옷은 달라졌다. 창작자로서 내가 옷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 그것은 어떻게 변모해 왔는지 돌이켜보았다.
집에서 입는 의복
프리랜서들은 집이 곧 일터다. 집이 일터기 때문에 생기는 장점도 많지만 자칫하면 퇴근이 없는 업무처에 살게 된다. 잘 멈추고 잘 일하기 위해서는 구획이 필요하다. 어떤 식으로든 경계를 만들어야 한다. 시간의 경계를 먼저 만들었다. 아침 여덟 시부터 거실의 책상으로 출근하듯 앉는다. 식사와 미팅을 제외하면 매일 여섯 시까지 거기서 쓴다.
공간의 경계도 이리저리 궁리한다. 커튼도 치고 모니터도 옮겨보고 의자도 바꿔본다. 가능한 건 다 동원한다. 하지만 공간을 아무리 분리하고 재배치해도 매일 새로워지는 데는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일이 끝났음을 스스로에게 선언하는 행위다. 그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나는 집에서 일할 때 몇 벌의 같은 옷을 번갈아 가며 입는다. 대체로 편안하지만, 원단이 좋고 따뜻한 옷들이다. 산문 작업을 할 땐 주로 린넨이나 밀도 높은 스웨터들을 입는다. 분량이 많으므로 몸이 가벼워야 한다. 입었을 때 몸을 잘 감싸는 종류의 옷들이다. 사진 작업을 할 때는 포켓이 많거나 움직임에 자유로운, 어느 때라도 갑자기 촬영이 가능할 듯한 의복을 걸친다. 현장에 있는 것 같아 긴장감이 생긴다. 시는 무슨 옷을 입고 있어도 쓸 수 있다. 그 공간을 빠져나갈 수 있게 해주는 매개이므로 그렇다.
어쨌거나 그 옷들을 벗으면 근무가 끝났음을 인지할 수 있다. 일종의 리추얼처럼 작용한다. 위아래 유니폼으로 정해둔 몇 벌만 입는 선택이, 그 지루한 반복이 인간을 얼마큼 효과적으로 설득하는지 모른다. 나는 옷에게 매일 속는다.
환복은 꽤나 실질적인 수행
효율이 바닥인 날이 있다. 연이은 마감으로 일도 잘 풀리지 않고 책상 앞에서도 멍한 상태로 앉아 있는 예외적인 날이다. 평소처럼 의복을 입어도 무기력하다. 스쿼트도 하고 차도 내려 마셨지만 여전히 몰입이 어려울 때 나는 첫 번째 규칙을 깬다. 의복을 벗고 중요한 미팅에 가는 사람처럼 외출복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새 정신을 불러오기 위해 착장을 전부 다시 고른다. 캐주얼하기만 한 옷을 피한다. 색이 많은 간절기 아우터를 입거나 평소 아끼던 바지를 입는다. 사무실을 바꿀 수 없으니 옷으로 사무 공간을 소환하는 셈이다. 악세사리는 착장의 무드에 어울리게끔 선택하곤 하지만 이런 날은 조금 볼드한 반지도 낀다. 이어커프를 두세 개씩 끼고 향수를 뿌리고 (이따금) 스카프를 하고 책상에 앉는다. 곧 만날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에 참석한 사람처럼, 나는 조금 다르게 앉은 채로 일한다. 환복은 꽤나 실질적인 수행이다.
러닝할 땐 화려한 플리스를 입자
러닝 크루가 성행 중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이유로 뛰는 건 아니다. 매일 앉아서 일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허리와 둔근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몇 시간씩 한 자세로 일하는 사람들은 조금 더 의식적으로 몸을 돌봐야 한다. 하지만 행사와 미팅 등의 이유로 스케줄이 들쭉날쭉한 데다, 혼자인 걸 선호하는 내향인인 나는 정기적으로 타인과 같이 뛸 수 없다. 함께 뛸 수 있는 자들은 가까이 사는 아내와 장모님뿐이다. 실제로 그들과 매주 토요일 함께 뛰고 운동하려고 한다. 아 그게 크루인가?
아내와 장모님 크루와 함께 나갈 땐 디테일이 많은 플리스를 입는다. 조금 화려한 플리스다. 소재가 소재인 만큼 마음이 편한 데다 색이 튀어도 맞춰 입기도 쉽다. 무엇보다 내가 무얼 입든 용인되는 자리이므로 휘뚜루마뚜루 손 가는 대로 아무거나 입는다. 그런 자리도 있어야 한다. 매번 촘촘하게 구색을 맞추는 나로부터 잠시 자유로워지는.
무대에 서는 자들
행사 전날이다. 잠들기 전에 수고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옷장 앞에 선다. 잠깐의 귀찮음을 이겨내면 여러모로 이롭다. 다른 무대에서 입지 않았던 착장을 미리 골라두는 게 언제나 후회가 없다. 다음 날 외출 10분 전에 서둘러서 결정하려 했다가 어떤 식으로든 — 배색이 아쉽다거나, 디테일이 너무 많다거나, 양말 색이 덜 묻는 등의 크고 작은 이유로 —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을 입고 간 날은 종일 성가신 느낌이다. 왜 그렇게까지 느끼는지 모르겠다. 착장 때문에 조금 덜 자신 있는 기분이다.
옷을 고를 땐 스스로에게 몇 가지를 물어야 한다. 촬영이라면 현장에 어울리는 옷인가? 진두지휘하는 현장일수록 이동이 편하되 눈에 띌 만큼 묵직하게 입는 게 좋다. 얼마큼 공식적인 무대인가? 독립 서점이나 작은 행사에서는 청바지에 가디건만 입어도 충분히 오피셜하지만, 커다란 기관의 프로그램이나 아티스트 토크에서는 블레이저 정도는 입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휩싸인다. 무대의 색이 지나치게 어둡다면 블랙이나 네이비 아우터는 피하는 게 좋겠다. 패턴이 너무 화려하면 괜히 민망해져서 어떤 무대에서는 나름 미니멀한 캐주얼한 피스 위주로 배합해서 갔는데 조금 머쓱했던 적도 있다. 생각보다 더 크고 구색을 차린 자리였던 거다. 한편, 시인들의 송년회에 셋업 슈트를 입고 참석했다가 당황한 적도 있다. 대부분 수수한 복장으로 왔는데 나만 너무 빼입고 온 것이다. 자리의 성격만큼이나 그 공간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중요하다. 옷은 우리의 태도를 직관적이고 시각적으로 반영한다. 필연적으로 나의 또 다른 외피다. 그러니까 스타일의 바운더리 안에서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는 인지하는 편이 좋다. 이는 무대 밑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다.
이렇게 세세히 언어화하기 전까지는, 나와 옷 사이 이렇게 많은 합의들이 존재했는지 몰랐다. 지난 몇 년 간 나와 옷이 관계 맺는 방식은 크고 작게 변했다. 앞으로도 변할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서 시작되어 개인들 사이에서 달라지는 변주들이 늘 흥미롭다. 그리고 그간 해온 선택을 반추해보는 시간이 재밌었다. 어떤 질서와 강박은 끄집어내 들여다보고 정리할 때까지는 제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각자의 질서를 가지고 옷장 앞에서 골똘해지는 모습이 좋다. 다른 표정으로 고른 착장으로 집에서, 운동장에서, 무대 위아래에서 오늘도 어딘가에서 교차하며 서로에게 영향 받는다는 사실이 좋다.
시인이자 사진가. 『눈에 덜 띄는』 『양눈잡이』 『아무튼, 당근마켓』 『끝내주는 인생』을 썼다. 현재 스튜디오 ‘작업실 두 눈’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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