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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꿈꾸는 섬, 시칠리아. 이탈리아의 가장 남쪽이자 지중해의 중심에 위치해있죠.
유럽의 끝이자 아프리카가 시작되는 위치적 특성으로 인해 그리스와 로마, 이슬람, 비잔틴, 노르만 문화와 건축양식이 고루 발전하며 공존해 온 지역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특성 덕분에 인문학 성지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지만 영화에 꼭 필요한, 바로 그 장면을 위해 전세계를 찾아 헤매던 감독들이 발길을 멈춘 곳이기도 해요. <트립 투 이탈리아>의 저자 한창호 영화평론가가 전설적인 영화들의 촬영 배경이 되었던 시칠리아의 명소들을 소개합니다.
영화 <시네마천국>의 배경이자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고향인 바게리아타운. © Andrew Mayovskyy / Shutterstock
세계 지도를 펴 놓고, 막연히 이탈리아를 바라보던 때가 있었다. 직장 생활 10년 차였고, 슬슬 인생의 다음 단계를 조심스럽게, 그리고 약간의 불안을 가진 채 꿈꿀 때였다. 한국에서 심리적으로 먼 나라, 하지만 가능하면 예술의 유산이 풍부한 나라를 찾고 있었다. 그때 시선에 들어온 시칠리아 섬은 너무나 멀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더욱 호기심을 자극했다. 저런 곳이라면, 나 같은 존재는 현실에서 사라지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부>(1972)의 주인공 마이클(알 파치노)이 뉴욕에서 경쟁 마피아의 두목을 살해하고, 현실에서 사라진 뒤, 스크린에 다시 등장하는 곳이 시칠리아이다. 바로 그렇게 시칠리아는 공간적으로 또 시간적으로도 현실계에서 벗어난 듯한 기분을 준다. 마이클이 엽총을 메고, 시칠리아의 벌판을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닐 때 그곳은 고대 그리스의 목가적인 풍경으로 보이기도 한다. 신들과 양 떼와 목동이 어우러진 ‘사라진’ 신화 속의 그곳 말이다.
1. 영화 <대부>의 촬영지인 사보카마을. 마이클의 결혼식 장면을 찍은 산 니콜로 성당 가는 길. © Mazur Travel / Shutterstock
2. 헨리코튼 24SS 캠페인, The Polished Sicilian Chic.
마이클의 성은 코를레오네Corleone인데, 시칠리아의 지명을 딴 것이다. 시칠리아의 주도 팔레르모Palermo에서 남쪽으로 6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도시 코를레오네는 지금도 마피아의 산실로 악명이 높다. 코폴라는 그곳에서 <대부>를 찍으려 했다. 하지만 도시는 너무 변해 있었고, 무엇보다도 현대화가 진행돼 ‘신화적인 멋’을 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장소를 바꾸었다. 섬의 동쪽에 아름답기로 유명한 타오르미나Taormina 인근에서 주요 장면을 찍었다. ‘대부 시리즈’의 팬들에게 가장 유명한 장소는 아마 마이클이 미래의 장인에게 청혼 허락을 요청하는 ‘비텔리 바’Bar Vitelli일 것이다.
비텔리 가족이 운영하는 바이다. 이곳은 타오르미나 인근의 작은 마을 사보카Savoca에 있다. 거의 산꼭대기에 형성된 마을이다.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이 이곳에 와서, 마이클이 앉았을 것 같은 외부 식탁에 앉아, 마이클을 흉내 내며 <대부>를 추억하곤 한다. 사보카는 이제 ‘신화가 된 대부’의 성지다.
마이클이 미래의 장인에게 청혼 허락을 요청하는 장면을 촬영한 비텔리 바. © Catay / Shutterstock
<대부>의 주요 장면이 촬영된 장소 주변에서 가장 큰 도시는 타오르미나이다. 이곳은 사실 많은 이탈리아 사람이 시칠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꼽곤 한다. 지금도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는 고대 그리스 극장, 황금빛 모래사장이 압권인 아름다운 바다, 그리고 비잔틴과 르네상스와 바로크까지 혼합된 독특한 시각적 외면 등이 이유로 제시된다. 그래서인지 이탈리아는 2017년 G7 정상회담의 주최국일 때, 이곳 타오르미나에서 행사를 진행했다. G7 환영음악회는 타오르미나의 고대 그리스 극장에서 열렸고, 그날의 오케스트라는 ‘라 스칼라’La Scala, 그리고 특별 지휘자는 정명훈이었다.
1. 바위산인 ‘로카 디 체팔루’ 아래 요새처럼 만들어진 도시 체팔루. 영화 <시네마천국>에 나오는 해변 촬영지로 유명하다. © Monticello / Shutterstock
2. 기원전 3세기에 지어진 타오르미나 그리스 극장. 그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어, 각종 오페라 축제와 클래식 공연장으로 활용된다. © Arts Illustrated Studios / Shutterstock
타오르미나 바다의 아름다움을 압도적으로 보여준 작품은 뤽 베송의 <그랑 블루>(1988)이다. 잠수 ‘괴물’인 두 청년의 이야기이다. 이탈리아 청년 엔초(장 르노)가 사는 곳이 타오르미나이다. 바다의 물빛이 사파이어처럼 푸른 곳이다. 엔초가 프랑스 청년 자크(장 마르 바)를 타오르미나에 초대하면서, 바다의 ‘숭고한’ 아름다움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숭고한 이유는 칠흑처럼 어두운 심연으로 청년들이 잠수할 때면, 그건 해저가 아니라, 죽음과 망각으로의 여행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코미디의 장인 우디 앨런은 타오르미나의 그리스 극장을 자신의 작품에 이용했다. <마이티 아프로디테Mighty Aphrodite>(1995)라는 작품으로, ‘전능하신 사랑의 신’이란 뜻을 지닌 제목이다. 뉴욕의 스포츠 기자 레니(우디 앨런)는 입양아를 받아들였는데, 친모가 누구인지 궁금하여, 호기심을 통제하지 못한다. 그는 규칙을 어기고, 아기를 낳은 여성을 찾아내고, 심지어 자기 신분을 숨긴 채 만나기까지 한다. 레니가 오이디푸스처럼 운명의 실수를 저지를 때, 화면은 갑자기 타오르미나의 그리스 극장으로 바뀐다. 그리고 과거 그리스 비극처럼, 가면을 쓴 합창단이 등장해 레니에게 조언을 하고, 또 관객을 위해 극의 전개를 설명하곤 한다. 신화의 주인공인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의 전능한 도움을 받으려면, 우디 앨런에겐 현대의 뉴욕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극장이 필요했을 것이다. 타오르미나는 이렇게 고대라는 시간성을 체현하고 있다.
1. 영화 <말레나>에서 모니카 벨루치가 뭇 남성들의 시선을 독점하며 걷는 장면을 촬영한 시라쿠사의 두오모 광장. © Mazur Travel / Shutterstock
2. 헨리코튼 24SS 캠페인, The Polished Sicilian Chic.
시칠리아 출신 감독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주세페 토르나토레일 것이다. 그는 팔레르모 바로 오른쪽에 있는 바게리아Bagheria 출신이다. 불과 32살 때 발표한 <시네마 천국>(1988)이 세계적인 흥행작이 되면서 그는 곧바로 유명 감독의 반열에 오른다. 영화관이 천국처럼 사랑받았던 과거에 대한 향수 어린 회상을 담은 작품이다. 그 작품의 주요 배경이 자신의 고향인 바게리아와 바로 옆의 체팔루Cefalù이다. 영화의 유명세 때문에 두 도시 모두 자신만이 <시네마 천국>의 주요 촬영지라고 선전하기도 한다. 토르나토레는 대부분 영화를 시칠리아에서 찍었다. 또 다른 대표작인 <말레나>(2001)는 폭력적인 파시즘을 배경으로, 사적인 사랑이 어떻게 공적으로 잔인하게 모욕당할 수 있는지 그리고 있다. 주인공 말레나(모니카 벨루치)가 군중의 시선을 독점하며 걷는 곳은 시칠리아 남동쪽의 시라쿠사Siracusa에 있는 ‘두오모 광장’Piazza Duomo이다.
그리고 토르나토레 감독은 좌파 정치가였던 부친과 자신의 소년 시절을 담은 자전적 작품 <바리아Baarìa>(2009)를 발표한다. 역시 파시즘 시절에 대한 시대극이다. 제목 ‘바리아’는 ‘바게리아’의 시칠리아 현지어(사투리)이다. 이렇듯 토르나토레는 주로 과거를 불러낸다. 이는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시칠리아 사람의 간절한 저항일지도 모른다. 시칠리아는 고대 그리스의 식민지로 개발됐다. 루키노 비스콘티는 대서사 멜로드라마 <레오파드>(1963)에서 시칠리아(인)의 특성을 주인공 돈 파브리치오(버트 랭커스터)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너무 늙었소. 2천 5백 년이나 된 위대한 문명 속에 살았소. 우린 지쳤소.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깊고 긴 잠이요. 우리가 원하는 건 망각이요. 우리의 폭력과 관능도 망각에 대한 욕망이요. 곧 죽음에 대한 욕망 말이요.” 돈 파브리치오의 말을 들으면, 우리가 현실에서 사라지고 싶은 망각의 꿈을 꿀 때, 또 막연히 이탈리아의 지도를 바라볼 때, 그 대상은 시칠리아가 되는 게 맞는 셈이다. 완전히 잊혀, 긴 잠에 빠지는 걸 원한다면 말이다.
본 원고는 브랜드 헨리코튼의 <트래블 로그>에서 발췌했습니다. 골프 챔피언이자 유럽 사교계 셀러브리티로 여행을 사랑했던 헨리코튼 경. 그가 세계 곳곳을 누비며 흡수한 다양한 영감들을 만나보세요.
중앙일보에서 기자로 일하며 동료들과 영화 토론 모임을 가졌고, 그 인연으로 영화 공부를 시작했다. 1997년 이탈리아로 유학, 볼로냐 국립대학에서 영화학을 전공한 뒤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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