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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과 안목에 관한 토크시리즈 TMT, 지난 9월 아티스트 장기하님과 특별한 TMT를 진행했어요. 친숙한 주제, 일상 대화처럼 말을 건네는 듯한 가사로 자신만의 색을 가진 뮤지션으로 손꼽히는 장기하님의 음악 취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았습니다.
Tip! 이번 Special TMT를 위해 장기하님이 직접 선정한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합니다. 음악과 함께 이 글을 감상한다면, 기하님의 이야기가 더욱 생생하게 다가올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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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달라도 되는 거 아닌가?
나이도 많은데 10대 때로 거슬러 올라가려니 좀 민망한데요(웃음). 저는 동시대의 가요를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초등학교 때는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를 좋아했고 중학교 때는 친구들이랑 노래방 가면 젝스키스, HOT 노래는 꼭 불렀고요.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했던 건 패닉입니다.
패닉의 ‘밑’(1996)이라는 앨범이 있는데, 이전에 제가 알던 가요들과는 너무 달랐어요. 가사가 꼭 잔혹동화 같기도 하고, 느릿느릿한 8분의 6박자에 현악기도 들어가고요. 곡 분위기가 좀 무섭게 느껴졌죠. 패닉의 노래를 들으면서 가요가 이래도 되는 거구나 알게 됐어요. 그때부터 조금씩 독특한 노래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무렵 악기를 접하게 됐습니다. 아버지가 통기타를 사주셔서 기타도 연습하고, 교회에서 드럼도 쳐보고요. 악기를 다루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밴드에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내가 연주한 악기들이 실제로 소리를 내고, 음악이 될 때 그 쾌감이 있거든요. 교회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해 ccm 자작곡으로 성탄절 공연도 했어요. 다시 생각해봐도 흔한 구성의 곡이었지만 표절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웃음). 나름 작곡이라는 걸 하게 된 거죠.
음악이 너무 재밌어서 부모님께 음대를 가겠다고 말씀드렸어요. 당연히 반대를 하셨죠. 네가 어느 정도 소질이 있는 건 알겠지만, 천재는 아닌 것 같다고요(웃음). 천재는 어릴 적 일화가 있는 법인데 너는 그런게 없지 않냐며, 천재도 음악 해서는 먹고 살기 힘드니 하던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을 가라고 하셨죠.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바로 접고 공부해서 대학을 갔어요. 저는 포기가 빠르거든요.
천재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대학을 갔는데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었어요. 대학 입시를 진짜 열심히 했거든요. 그랬더니 이제는 뭔가를 참아가면서 하는 게 싫은 거예요. 그래서 신나게 놀았더니 어느새 대학교 3학년이 돼있더라고요.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죠.
어느 날 RHCP의 ‘Blood Sugar Sex Magik’(1991)이라는 앨범을 1번부터 듣는데 너무 흥분되더라고요. 어떤 느낌이냐면, 쉐프가 진짜 열심히 맛있게 만든 요리를 먹으면, ‘세상에 이런 맛이 있나?’ 싶잖아요. 단맛도 나고, 짠맛도 나고, 하나하나 음미하게 되는 거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천재 아니어도 음악 좀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러고 나서 서울대입구역에 있는 실용음악학원을 등록했어요. 프로드러머가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선생님들이 하루에 8시간씩 세 달만 연습하면 전화가 온다고 하시더라고요. 누구한테 오는 거냐는 질문엔 답을 흐리셨지만(웃음). 그 말을 일단 철석 같이 믿고 연습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했어요. 얼마 뒤 정말로 연락이 왔습니다. 자작곡으로 홍대에서 공연을 준비하고 있으니 드러머로 함께 하자는 거였죠. 그렇게 ‘눈뜨고 코베인’이라는 밴드의 창립멤버가 됐어요.
우리말 가사를 더 많이 써도 되는 거 아닌가?
사실 밴드에 처음 들어갔을 땐 조금 실망했어요. RHCP 같은 밴드를 상상하면서 들어갔거든요. 펑키하고 박자도 막 쪼개는 스타일의 음악을 하고 싶었는데, 같이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 산울림을 커버하자고 하더라고요. 그때까지 산울림의 노래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동시대의 음악들에 익숙했던 제게, 밴드 형들은 제가 태어나기 이전의 노래들을, 제 주변 사람들은 잘 모르는 노래들을 정말 많이 추천해줬어요. 일종의 집중 취향 훈련 같은 걸 받은 셈이에요.
산울림, 송골매, 신중현, 송창식 선배님들의 곡은 물론 비틀즈, 토킹헤즈, 조이디비전, 벨벳언더그라운드 같은 해외 뮤지션들의 노래까지 1집부터 모두 정주행했어요. 거의 개종 수준이었죠(웃음). 60, 70년대 음악에 빠져들었어요. 거기에 굉장히 경도되면서 동시대의 음악을 무시하기도 했죠. ‘음악은 퇴보했다’면서요.
옛날 한국 음악을 특히 좋아했어요. 산울림이 대표적이죠. 영어로 가사를 쓰거나 발음을 외국어처럼 하는 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우리말 단어들, 우리가 사용하는 그런 발음을 곡에 써도 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더 개성 있고 재밌는, 더 한국 음악다운 창작물이 나온다는 걸 알았죠.
저에겐 정말 중요한 시기였어요. 지금까지도 우리말 가사에 대한 생각만큼은 변함이 없거든요. 장기하와 얼굴들 활동을 하면서 제 나름대로 다양한 실험과 연구를 했어요. 그래서 우리말의 운율이나 말맛에 대해서는, 우리말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이들에 비해 제가 앞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특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닌가?
산울림을 포함해서 제가 눈뜨고 코베인 시절에 듣던 음악들은 독특한 음악이 많았어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엔 ‘독특하지 않은 음악은 구리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장기하와 얼굴들 초중반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죠. 음악은 독특해야 하고, 평범한 건 나쁜 거라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만, 저는 싫어했던 밴드가 오아시스에요. 오아시스 노래는 예상을 빗나가는 법이 없었거든요. 코드 진행이나 멜로디 같은 게 예측 가능했어요. 오아시스가 2009년 가을에 해체되기 한 달 전쯤, 지산 벨리 록 페스티벌에 왔었는데 저도 그 무대에 섰거든요. 당시 오아시스 공연을 보면서 ‘진짜 지루한 노래네. 역시 구린 밴드였어.’ 이렇게 생각을 했었죠(웃음).
이후 라디오를 진행하게 됐는데 PD님이 선곡한 오아시스의 노래가 오프닝곡으로 나왔어요. ‘좋은데?’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더라고요. ‘The Importance of Being Idle’이란 노래에요. 여유롭게 좀 살자는 가사도 마음에 들고, 그때부터 오아시스의 노래를 찾아서 듣고 또 인터뷰도 찾아보게 됐어요. 결국 1년도 안되어서 오아시스를 완전히 좋아하게 됐죠.
오아시스의 작법 자체가 평이하다는 생각이 변한 것은 아니지만, 반복적인 곡 구성과 누구나 따라부를 수 있는 멜로디에서 대중음악가로서의 관록을 느꼈고,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을 때 굉장히 긍정적인 에너지가 생기는구나를 느낀 거예요. ‘독특하지 않은 음악도 괜찮은 거 아닌가?’로 생각이 바뀐거죠. 오아시스가 재결합을 한다고 하는데, 저로서는 많이 묘합니다. 오아시스가 해체한 뒤로 이 뮤지션을 좋아하게 된 거잖아요. 마치 죽은 존 레논이 다시 부활해서 새 앨범을 내는 느낌이랄까요.
생각이 바뀌어도 상관 없는 거 아닌가?
이렇게 돌아보니 저는 제가 기존에 하던 생각을 바꾸게 만드는 음악들을 좋아했더라고요. 패닉을 좋아하게 됐을 때는 ‘가요가 이래도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RHCP의 음악은 ‘이 정도로 좋으면 천재 아니어도 음악 해도 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어주었고, 산울림은 우리말을 공격적으로 써도 된다는 걸 가르쳐주었죠. 오아시스는 음악이 독특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주었고요.
장기하와 얼굴들 1집에 녹음했던 노래들을 다시 들어보면, 단어를 발음하는 것들이 제가 듣기에도 김창완 선배님이나 배철수 선배님을 따라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런데 2집, 3집으로 갈수록 그 선배님들께 덜 기대게 되더라고요. 선배님들은 훌륭하시지만, 그분들을 바이블이라고 생각하는 건 위험하죠. 그분들은 그분들이고, 나는 나니까. 결국 지금 제가 사용하는 창법이 제 평소 말투랑 가장 비슷해요.
살다 보면 ‘이건 이런 거야’ 파악이 되고 학습되면서 안정되는 시기가 있고, 반대로 그 생각이 깨지는 시기가 있습니다. 저는 그 깨지는 시기들을 즐겁게 여기고 받아들이면서 지금의 취향과 안목을 갖게 된 게 아닌가 싶어요. 취향이 처음 형성되는 단계에서는 정답이라는 걸 상정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결국 나만의 것을 찾고 싶다면 내가 사랑하는 무언가와도 이별할 결심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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