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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과 안목을 발견하는 토크 시리즈 TMT의 7번째 시간은 박찬용 에디터와 함께 했습니다. 그는 독서 플랫폼에 자신의 물건을 주제로 한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는데요. 에세이 소개글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어느 에디터가 고심 끝에 이상한 물건을 골라 곤란해지는 한편 즐거워하는 이야기”. 그가 고른 이상한 물건들에 담긴 흥미로운 이야기, OLO매거진 독자분들에게도 들려드릴게요.
물건엔 죄가 없다
몇 년 전, 여러 우연과 충동의 결과로 오래된 집을 하나 구매했습니다. 지어진 지 50년 정도 된 낡은 집이었어요. 심지어 준공 당시의 창틀이 그대로 붙어 있을 정도로 한 번도 수리된 적 없는. 집을 뜯어고칠 작정이었기에 마침 출장으로 방문한 스위스 바젤의 한 전기용품 가게에서 스위치를 몇 개 구매했어요. 도자기 재질에 정사각형 모양과 단정한 곡선, 제가 찾던 바로 그 스위치였죠.
개인 사정으로 수년을 미루다 겨우 집 인테리어 시공을 시작했어요. 집을 고쳐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상과 현실은 많이 다릅니다. 저 역시 그랬고요. 철거 후 드디어 그 스위치를 쓸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들떠있었는데, 국내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스위치와 규격이 달라 저희 집 벽에는 설치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낙담하던 차에 기존 콘크리트 벽에 나무 벽을 덧대기로 하면서 문제가 해결되는 듯했어요. 나무 벽에 스위치 모양에 맞는 구멍을 뚫으면 될 테니까요. 한 달쯤 걸려 나무 벽이 설치되고, 기쁜 마음으로 인테리어 실장님께 스위치 설치를 부탁드렸습니다. 밖에 있는데 오후쯤 실장님께 전화가 왔어요. 경험상 인테리어 관련해 좋은 일로 연락이 오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전화를 받았죠. “이 스위치 써보셨어요?” 실장님이 물으셨어요. “이거 초인종이에요”.
결국 다른 스위치를 구매해 설치했습니다만 그 초인종들을 버리진 않았어요. 저에게 교훈을 준 물건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예쁘거든요. 잘 만들어졌고요. 물건엔 죄가 없습니다. 오늘 제가 들려드릴 이야기들도 대체로 비슷한 이야기들일 것 같아요. ‘기호’를 가장한 제 한심함에 관한 이야기죠(웃음).
박찬용의 기호를 이루는 것
① 고유한 것
저는 고유한 특성을 지닌 물건을 좋아합니다. 지난 봄 동대문 DDP에서 열린 ‘까르띠에, 시간의 결정’ 전시에 가보셨나요? 까르띠에의 주얼리 뿐만 아니라 전시에 쓰인 나무들도 작품이었어요. 네크리스들이 목재로 된 토르소 위에 전시되어 있었죠. 그 토르소를 만드는 데 쓰인 목재가 바로 이거예요. 진다이 목재(神代木).
진다이는 일본 특산품의 일종인데 화산재 속에서 썩지 않고 천년 이상 보존된 희귀한 목재를 말해요. 화산재 안에서 나무가 화석화가 되면서 만들어진 자원으로 매우 귀한 목재로 여겨집니다. 까르띠에 전시에 사용된 진다이들을 보니 겉면에 샌딩 처리를 하지 않았더라고요. 그만큼 진다이의 고유한 무늬가 귀하다는 의미일 텐데, 제가 그걸 질렀습니다.
집 인테리어를 하면서 목재에 관심을 보이니 목수 실장님이 안성에 위치한 '죽산 목공소'를 소개해 주시더라고요. 거기서 1년에 네 번 바자회를 하는데, 가면 좋아할 것 같다고요. 그래서 얼마 전 열린 바자회에 방문해 기어이 진다이 목재를 사 왔습니다. ‘정말 갈 데까지 갔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목재를 차에 싣고 돌아왔습니다(웃음). 하지만 이렇게 집에서 나무의 무늬를 감상하고 있으면 저는 기분이 참 좋더라고요.
이건 집에 있는 또 다른 목재인데요. 이런 무늬를 가진 목재를 마파 벌(Mappa burl)이라고 부르는데, 나무의 줄기나 가지가 갈라지면서 생겨나는 뒤틀린 형상의 목리를 가진 미정상 생성물입니다. 24년에는 이 무늬를 보면서 나름의 위안을 얻기도 했어요. 나무의 아픔이 사람들에겐 아름다움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나의 한심함도 어딘가에선 이야깃거리가 되겠구나 하고요. 나의 고통과 남의 즐거움이 같이 갈 수도 있는 게 인생이라는 깨달음이죠. 일종의 과대망상 같은 겁니다(웃음).
② 시간에 무너지지 않는 것
제가 고유한 것들을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면 ‘시간에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과 연결돼요. 나름의 역사가 있는 것들은 시간을 견뎌냅니다. 라우펜이라는 회사를 아시나요? 욕실 용품계의 샤넬이라고 하면 이해가 쉬우실 텐데, 스위스 기반의 고급 욕실용 도기를 제작하는 회사입니다. 유럽의 옛날 고급 건물에 가보면 세면 도기들이 라우펜 제품인 걸 발견할 수 있죠. 1990년 라우펜은 포르쉐 디자인과 협업을 통해 제품을 선보이는데, 이게 라우펜 사(社)최초의 콜라보 제품이라고 해요. 이걸 왜 말씀드리냐고요? 그 제품도 저희 집에 있거든요.
학동역에는 고급, 고가의 인테리어 자재를 판매하는 상점들이 많지만 그중에는 악성 재고를 판매하는 매장도 있습니다. 그런 매장이 맥도날드 지하 1층에 있었어요. 그 매장에서 우연히 이 세면대를 보았는데 디자인이 어딘가 남다르기에 사장님 몰래 검색을 해봤죠(웃음). 그때 이게 라우펜과 포르쉐 디자인의 협업 디자인이란 걸 알았어요. 가격을 여쭤봤더니 30만 원이라더라고요. 출고가는 100만 원이 넘었다는데(심지어 도이치 마르크 시대에), 그런 물건이 한국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30년째 묵혀있다가 제 눈에 띈 거예요.
제가 사는 물건들은 이런 식입니다. 이런저런 좋은 이야기도 담겨 있고, 완성도도 있는데 한국의 유행주기가 너무 빠른 나머지 이리저리 휩쓸리다 저렴하게 나온 것들이죠. 한때는 한국 시장이 내 맘 같지 않아 아쉬운 적도 있었지만, 나한테 이만큼 좋은 나라도 없다는 생각이 이제는 듭니다.
시간과 관련해 소개하고 싶은 물건이 또 있는데요. 호르겐 글라루스 의자입니다. 2018년 평창올림픽 직전, 스위스 정부에서 한국 취재진들을 초청한 적이 있어요. 메이드 인 스위스의 면모를 보여주겠다며 여러 공장들을 견학시켜줬는데 그 코스 중 하나가 호르겐 글라우스 공장이었죠. 요즘 비싸고 유명한 디자인 가구들이 많지만, 호르겐 글라루스는 1880년에 창립된 스위스에서 가장 오래된 의자 전문 회사로 아직도 글라루스 가문에서 직접 공장을 운영해요. 이 의자는 굉장히 고난도 작업을 거쳐 만들어지는데, 바로 나무를 굽히는 과정이에요. 나무를 깎아서 곡선을 만드는 게 아니라 열과 증기를 가해 휘어지게 만드는 거죠. 실제로 보면 공예감이 무척 뛰어납니다. 만듦새가 정말 좋아요. 신제품은 50만원이 넘는 고가 제품이지만 저는 빈티지 시장에서 괜찮은 가격에 구매했어요. 다행이 디자인이 변한 적이 없어 중고 시장에 꽤 많이 나와있거든요. 제가 만드는 원고와 책들 역시 이 의자처럼 좋은 만듦새로 시간을 견뎠으면 좋겠습니다.
③ 이야기 또는 이유와 맥락이 있는 것
물론 재화가 부족한 상태에서 시간을 견디는 물건을 소유하기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마음에 드는 공산품을 찾는 것만큼이나, 제가 마음에 드는 걸 만들기도 어려우니까요. 제가 스툴을 구매하려고 알아볼 때였어요. 아무거나 사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수십만 원짜리 아르텍을 사자니 비싸기도 했고 여러모로 내키지 않았습니다. 결국 구매한 게 이케아 뉘틸베르카드 컬렉션 스툴이에요. 이케아 제품들 중에서는 프리미엄 라인에 속하는 제품이죠.
이 제품은 원래 시트가 검은색 PVC 소재로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PVC가 내구성은 좋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딘가 초라해 보이는 특유의 느낌이 있거든요. 고민 끝에 신뢰하는 분에게 부탁해 마음에 드는 색의 가죽으로 리폼을 했습니다. 자투리 가죽으로 벨트도 만들었고요. 스툴 하나 두는 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요? 네, 저는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입니다(웃음). 마음에 드는 물건을 만난 기쁨도 크지만, 이런 종류의 작업을 함께 할 누군가가 있다는 것도 제게는 큰 기쁨으로 다가오거든요.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기호에 맞는 물건들을 소비하는 게 제게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무엇을 해서 얼마를 버느냐보다, 어디에 쓰느냐가 중요했던 사람이거든요. 어디에 쓰는 게 가치 있는 걸까 고민했고요. 그 질문에 답을 하려면 무엇이 가치가 있는 것이고, 가치라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야 했죠. 그게 제가 에디터로서 물건을 다루는 잡지에서 일을 한 이유 중의 하나였어요.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취향이라는 말이 최근 우리 사회에서 굉장히 많이 보이니까 '나도 멋진 취향 하나쯤 있어야 하나?' 고민하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요. 자신만의 이유를 찾아보는 건 의미 있는 일입니다. 물건에 대해 생각해보고 알아보는 것도 재밌는 일이죠. 하지만 그런 것쯤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정말 멋진 삶이에요.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듦에 따라 자연스레 관심이 가는 분야가 생길 거예요. 와인이나 위스키도 좀 알고 싶고, 무엇이 좋은 가구인지 궁금해질 수도 있고요. 그러면 그때 가서 나름의 방식으로 즐기면 됩니다. 그것에 대해 많이 안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더 잘나고 세련된 것은 아니라는 걸 꼭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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