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KOLONMALL. ALL RIGHT RESERVED
서울 니트의 옛 고향
해방촌 제2공영주차장 입구 맞은편 건물은 이 동네 역사의 지층같은 곳이다. 1층에는 프랑스인이 운영하는 레코드 숍 겸 카페인 투스키가 있다. 그 옆에는 해방촌스럽게 자유로운 분위기의 꽃집 그린그라피 제이가 있다. 둘 다 인기도 좋고 분위기도 좋다. 그 지하에도 사업체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젊은이는 얼마나 될까. 건물 우측 입구로 들어가 계단을 내려가면 벗어둔 신발이 많은 현관에 도착한다. 니트 공장이다. 한때 해방촌의 주산업이었던.
1) 니트에 들어가는 벨트의 막바지 작업을 진행하는 모습.
2) 비슷해 보이는 도구들이어도 니팅 공정의 어떤 과정을 수행하느냐에 따라 모두 용도가 조금씩 다르다.
해방촌은 메이드 인 서울 니트 생산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였다. 해방촌의 행정동명인 용산동 2가 일대의 언덕배기 주택가 곳곳에서 편직부터 출고까지의 니트 제조 공정 전반이 이루어졌다. 창신동(생산)과 동대문시장(유통)의 관계처럼, 해방촌에서 만들어진 니트는 남대문시장을 통해 전국으로 유통되었다. 지금은 힙스터 분위기로 유명한 신흥시장도 사실은 해방촌 니트 시장의 배후 지역으로 발전한 곳이다. 1980년대 해방촌 니트 생산업체는 약 300여 곳에 이르러 전국 니트 유통 물량의 30%를 해방촌에서 생산했다고 한다. 옛날 이야기다. 오늘날 해방촌 니트 생산업체는 약 50곳 정도로 축소되었다. 오늘 찾은 곳이 니트 생산기지 해방촌의 명목을 잇는 곳 중 하나였다.
니트라 해도 뜨개질처럼 한 사람이 옷 한 벌 전부를 만드는 건 아니다. 해방촌 니트 공장에서는 각 부품을 꿰매고 다듬어 옷으로 출고시키는 과정까지의 일을 한다. 원단 및 주요 부품은 서울 외곽에서 출발해 이 곳에서 최종적으로 조립된다. 자동차 공장과 비슷한 개념이다.
이 공장은 소셜 벤처 기업과 함께 한다. 업사이클링 제품을 만드는 니들앤코가 공장 운영과 영업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주인공인 아란 니트에서 시작해 다양한 종류의 생산과 수요에 대응한다. 취재차 찾았던 날에는 아란 니트의 출고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다 만들어진 니트의 실밥 등을 일일이 보며 쪽가위로 잘라내는 등의, 잘 되면 티가 나지 않지만 못 되게 보면 티가 나는 미묘한 작업이다. 공장은 매일 진행하는 작업이 다르고 그에 맞춰 매일 출근하시는 분들도 다르다.
이날의 근로자들께서 만드시던 아란 니트를 발주한 회사는 한림수직이다. 한림수직은 제주도에서 아일랜드인의 지도를 직접 받아 아란 니트 등 고품질의 니트웨어를 만들던 회사다. 왜 제주도에서 정통 아란 니트를 만드는지, 아란 니트가 무엇인지 찾다 보면 흥미롭고도 오묘한 이야기에 닿게 된다.
아일랜드
흔히 케이블 니트 또는 꽈배기 니트라고도 불리는 아란 니트의 고향은 아일랜드다. 아란은 아일랜드 서부 골웨이 만에 있는 3개의 섬 지역을 말한다. 영어 대신 켈트족 언어인 게일어를 쓰는 곳이고, 이 섬에서 짜던 스웨터가 아란 니트다.
니트는 증기를 가하면 사이즈가 조금씩 변한다. 보통 집에서는 그래서 니트 취급에 주의해야 하지만 생산공장에서는 오히려 그 성질을 이용해 사이즈를 일치시킨다. 사이즈에 따라 틀을 끼우고 거기에 스팀 다리미의 증기를 가한다
아란 니트에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있다. 아란 니트는 아란 지역 남자 뱃사람들이 많이 입었다. 아내들이 춥고 거친 바다로 가는 남편을 위해 떠 주었다. 그래서 아란 니트는 집집마다 조금씩 니트의 패턴이 다르다. 뱃사람이 일하다 바다에 빠져 세상을 떠난 뒤 한참 뒤에 앞바다로 쓸려왔을 때,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로 돌아와도 무늬를 보고 알아보기 위해서라고 한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이자 아란 니트를 말할 때 으레 언급되는 에피소드지만 사실은 아니다. 이건 아일랜드인들의 말을 듣고 쓴 연극 <바다로 달리는 사람들>에 쓰인 이야기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모여 아란 니트 특유의 분위기를 꿰는 전설이 된다.
이 니트를 한국에서 만들게 된 계기가 감동적이다. 감동적인 이야기 속에는 한국 농촌 발전의 숨은 공신들인 서양 선교사가 있다. 제주도에는 아일랜드 출신의 패트릭 제임스 맥글린치, 임피제 수사가 있었다. 그는 제주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아일랜드 수녀들을 모셔와 정통 아란 니트 뜨개질을 제주 지역 여성들에게 가르쳤다. 제주의 특산물이나 산업 기반이 없어 여성들이 육지로 고생하러 가던 시절이었다. 한림수직은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사회적 기업이되 제조 제품이 럭셔리였다. 한림수직의 니트는 고품질을 인정받아 제주 칼호텔과 조선호텔 등 고급 상점에서 판매되었다.
한림수직은 한국의 발전과 함께하고 한국의 성공과 함께 사라졌다. 한림수직의 장인들은 나이가 들어 갔고 사람들은 단정한 고급 아란 니트보다 더 저렴한 수입산과 화려한 옷들에 눈을 돌렸다. 한림수직은 기존에 보유하던 양털과 니트를 대폭 세일하며 재고를 소진시킨 뒤 2005년 문을 닫았다. 이날 해방촌에서 마무리 작업을 진행하던 한림수직 니트는 2021년 부활한 한림수직이다.
검수 절차를 거쳐 더스트백에 넣으면 니트 생산이 마무리된다. 지금쯤에는 누군가의 따뜻한 '2024 룩'의 일부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한림수직이 새로 살아난 비결과 과정도 이야기다. 지금 한림수직의 모회사는 콘텐츠그룹 제주상회. 이름처럼 제주의 매력적인 이야기들을 콘텐츠로 만들어 상품화하는 회사다. 이들은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로컬 상품개발을 계획하다 한림수직의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인 빈티지 애호가들이 한국에서 잊혀진 한림수직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제주상회는 이시돌 목장과 협업해 한림수직을 깨웠다. 코로나 시국인 2021년에 다시 태어난 한림수직은 크라우드펀딩 액수가 1억원을 돌파하는 등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극적인 부활이었다. 한림수직의 매출은 그 이후인 2022년과 2023년에도 성장했고, 그 결과 이들은 조금 더 극적인 부활을 시작했다. '장인 라인'을 만든 것이다. 장인 라인은 당시 실제로 니트를 짜던 제주 장인들이 직접 짜서 만든다. 그 분들이 여전히 니트를 짜신다. 손에 새겨진 기술은 남아 있으니까. 그 현장을 확인하려면 제주로 가야 한다.
애월
12월 2일 월요일 오전 10시 애월. 작은 가게 한 켠에 사람들이 모여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연히 모두 여성이라는 점만 빼면 구성이 다양했다. 나이는 20대로 보이는 분부터 장년층으로 접어든 분까지. 제주에서 오신 분은 물론 차로 1시간 거리인 서귀포에서 오셨다는 분이 계셨다. 서울에서 아침 비행기를 타고 오신 분이 계신다고 해 탄성이 흘렀고, 그 뒤로 새벽 1시에 여수에서 출발해 배를 타고 오셨다는 분의 말씀이 이어졌다. 그 모두가 이곳에 뜨개질을 하러 모인 곳이었다. 한림수직표 아란 니트 '장인 라인'을 만드는 김명열 장인께서 오늘의 선생님이었다.
김명열 장인은 한림수직의 산 역사다. 젊은 날 아일랜드 수녀들에게 제주에서 영어로 아란 니트 뜨는 법을 배웠다(그래서 요즘 쓰는 한국어 뜨개질 용어는 잘 모른다고 하셨다). 평생 한림수직에서 뜨개를 하고 검품을 하며 제주에서 살았다. 한림수직이라는 회사는 사라져도 평생 손으로 익힌 감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백발 노인 김명열 장인이 싱글싱글 웃으며 뜨개를 하는데도 다른 학생들이 그의 속도를 따라가기 어려워했다. 수업 내내 학생들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선생님 조금만 천천히 해 주세요..."라는 부탁을 계속했다.
한림수직은 2021년 부활한 후 김명열 장인같은 분을 찾아내어 2023년 '장인 라인'을 출시했다. 일반 한림수직 니트는 해방촌에서 공장형 방식으로 만들고, 장인 라인은 김명열 장인같은 분들께서 직접 손으로 한 코 한 코 짜서 만든다. 사람이 손으로 짜니 가격도 그만큼 올라간다. 장인 라인 니트 가격은 80만원대에 이른다. 싼 가격은 아니지만 이제 한국에 80만원 넘는 니트도 많다 그래서인지 김명열 장인이 직접 짜는 한림수직 니트는 2년치 주문이 꽉 차 있다고 한다. 한국의 소비가 성숙해지며 한림수직의 가치가 이제야 인정받는 중이다.
이날의 니팅 스쿨도 잠재적 미래 장인 육성 프로그램이다. 이 니팅 스쿨의 근원적 목표는 '장인 라인'을 만드는 니터 육성이다. 이 코스에에서 잘 배워서 김명열 장인이 인정할 만한 실력을 갖게 된 니터는 한림수직 장인 라인을 만들 수 있다. 물론 강요는 아니다. 제주상회의 한림수직 담당 김지영 매니저도 "실제로 (강의에 참가하신)이 분들께서 그렇게 해주실 지는 모르겠지만요." 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지영 매니저 본인도 제주 아란 니트에 강한 흥미를 느껴 서울 생활을 접고 제주도로 이주해 일하는 중이다. 서귀포에서 오셨다는 장년의 학생께서도 "이 분(김명열 장인)만의 뜨개질 스타일을 배우러 왔어요. 확실히 다른 게 있어요." 라고 이야기했다. 뭔가를 짜고 뜨는 일에는 그만큼의 매력이 있다.
손으로 짠 니트에 감성적인 매력만 있는 건 아니다. 김명열 장인의 니팅 코스는 고급 아란 니트의 조건에 대한 강의이기도 했다. 김명열 장인의 말을 종합하면 고급 니트의 조건은 편안한 착용감과 선명한 무늬다. 니트는 1차원의 실로 2차원의 면을 만든 뒤 3차원인 사람의 몸에 걸쳐지는 옷이다. 어떤 부분은 튼튼하면 좋고 어떤 부분은 신축성이 좋아야 편하게 입고 벗을 수 있다. 이 모든 느낌을 니팅 방식에 따라 조정할 수 있다. 아울러 아란 니트의 다양한 밧줄 무늬 역시 사람이 하자 한층 더 도톰하고 선명했다. 김명열 장인은 이날 자신이 직접 뜬 니트를 입고 강의를 진행했고, 손자에게 줄 니트를 견본으로 가져오기도 했다. 입어보니 팔에 끼이는 신축성의 느낌부터 달랐다. 늘어지지 않게 조이되 불편하지는 않을 만큼의 절묘한 정도. 고급품의 질감과 촉감이었다.
"우리는 지금 50년 넘게 갈 옷을 만드는 거에요." 김명열 장인께서 수업 시간에 하신 말씀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글로벌 의류 회사가 주 단위로 신상품을 내고, 글로벌 단위의 대기업이 불과 몇 년만에 로켓성장을 하는 21세기의 시간 감각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하지만 50년 뿐일까. 인간은 실을 짜고 걸치며 천천히 문명을 이룩해 왔다. 바늘 두 개를 교차시키는 뜨개질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들여 옷을 만들며 살아왔고, 그 기술과 옷들이 공간을 건넜다. 그 결과가 아일랜드의 전통이 제주도로 넘어온 한림수직이다. 저널리스트 버지니아 포스트렐이 <패브릭>에 적은 말처럼, 인간은 '1차원의 실로 2차원의 면을 만들기 위해 3차원의 상상을 하며' 니트를 만들고 문명을 이룩했다.
지금 니트 제조는 3D로까지 발전했다. 이제 기계가 니트 한 벌을 통으로 만든다. 동시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한 코 한 코 니트를 뜬다. 뜨개질은 이제 MZ의 취미로 자리잡아 요즘은 각자의 집에서 유튜브를 틀어두고 뜨개질을 하기도 한다. 매주 월요일 오전에 애월에 모이는 열혈 니터도 여전히 있다.
그리 생각하면 올 겨울 아란 무늬 니트가 남다를 듯하다. 니트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긴 시간과 발전을 거쳐 여전히 사람의 손으로 마무리되는 물건이다. 그 자체로 문명의 한 조각이자 문명 발전의 증거물이다. 그 증거물이 지금 내 몸을 덥혀 주고 있다.
정보를 찾고 정리해 페이지를 만듭니다. 에디터로 일하며 각종 매체에 원고를 기고하고 있습니다.
다큐멘터리부터 엔터테인먼트까지 영역을 가리지 않고 활동하는 사진가. 다양한 곳에서 그의 사진을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일본 등 해외 활동도 활발하다.
첫번째 댓글을 달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