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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비히 왕족의 집착적인 수집 흔적이 남아있는 독일 뮌헨으로, 멸종 위기종 붉은 정강이 원숭이 가족이 사는 베트남 다낭으로, 때때로 여행을 다녀오는 시간이 업무의 일환인 잡지 에디터로서 사적으로도 여행을 잘하느냐는 질문을-오늘 이 글을 쓰는 연유와 같이-종종 받곤 하지만, 아니다. 이 화자는 글렀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의 사례라고 소개하기에도 한참 모자라다.
당장 이번 여름 휴가만 해도 ‘오랜만에 해외로 떠나볼까? → 벌써 날짜가 이렇게 됐네, 어디로 가지? → 벌써 날짜가 이렇게 됐네, 가까운 데나 갈까? → 벌써 날짜가 이렇게 됐네, 비행기표와 숙소 좀 알아 볼까? → 어어, 이렇게 비싸다고? 어어, 이 돈 주고 여기를…?’ 끝에 벌써 날짜가 이렇게 됐기 때문이다.
#내 여행의 흔적
돌아보면 내 여행의 흔적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계획대로 하는 것이 없는 게으름. “계획대로 되는 것이 없다”고 억울할 일은 없다는 점이 작은 위안이다. 하여 이 이야기에는 여러분도 다음 여행에 참고하시라 권하는 유용한 일정도, 줄 서서라도 맛보시면 좋겠는 현지 인기 맛집 명패도, 반드시 인증 샷을 찍으시라 추천하는 사진 명소 리스트도 없다. 그저 무계획적이고 무분별한 발걸음 후 남은 몇몇 잔상이다.
한 달 전 오사카 여행의 예를 들 수 있겠다. 업무 출장으로 떠난 오사카에서 여정 마지막 날 반나절 정도 혼자 보내는 시간이 생겼다. 그간 돌아보지 못한 숙소 주변 동네를 한 바퀴 걸어야겠다 싶었다. 오사카 여흥의 중심지 도톤보리와 신사이바시에서 약간 떨어진 동네는 한산하고 아담해 산책하기 넉넉해 보였다. 어디로 가볼까. 지난 며칠 숙소를 오가다 궁금해진 외관들이 스친다. 문 앞에 책을 쌓아둔 걸로 보아 서점이지 싶은 곳, 영업시간이 끝나 불 꺼진 창 안으로 공예품이 얼핏 보이던 상점. 우선 숙소에서 몇 발자국 지나지 않은 모퉁이에 있던 공예품 가게 추정지로 향해보기로 한다.
대낮 가게 내부는 밤보다 공예품이 선명했다. 다만 공예품에 걸린 액세서리도 빛났다. 비정형의 그릇, 입술 닿는 부분이 얇은 잔, 이외 무용한 무엇이든 쓸어 담아야지 다짐한 기대와 달리 그곳은 공예품점이 아닌 액세서리 가게였던 것이다. 실반지와 얇은 체인 네크리스가 제법 멋졌으나 이러한 품목에는 관심이 덜한 나로서는 멋쩍게 목례를 하고 돌아 나오는 발끝, 웬 돌멩이 하나가 눈에 걸린다. 茶, 차?
‘茶 차’라고 쓰인 돌멩이가 조그맣지만 분명하게 안내하는 계단 위 미지를 외면할 수 있나. 계단 끝 문턱을 넘어설수록 옅게 달그닥거리는 식기 소리와 이국의 대화가 흐른다. 이곳의 이름은 ‘와드(wad)’. 다양한 산지와 맛의 차를 선택할 수 있는 메뉴 앞에서 차 전문점이라는 특색을 짐작한다. 그러고 보니 보인다. 조각품처럼 놓인 다구들, 조용히 열기를 내고 있는 화로 위 주전자, 그 사이를 능숙히 오가며 고요하게 찻상 한 상을 차려내는 팽주. 결론은, 이곳에 가기 위해 다시 오사카를 찾고 싶다. 한 입 거리 말린 과일. 쌉싸름하던 녹차의 첫 맛. 찻주전자가 비면 다시 따뜻한 물을 채워주며 이번에는 얼마큼의 수를 센 후 드시라 건네던 간결한 다정. 그리고 맛보는 다음, 그다음, 갈수록 달아지던 녹차의 맛. 불 위에서 굴린 떡. 호지찻잎으로 적신 빙수…. 온통 먹거리 얘기지만, 그러니까, 이 모든 맛을 하나의 기억으로 만든 그곳의 공기. 세상에는 여기보다 훨씬 더 맛있고 대단한 찻집이 많겠으나 그날 그 순간 내게 열린 세계는 ‘와드(wad)’라는 평온이었다.
#콜롬보 코너 숍
오랜만에 흡족스러운 과식을 마치고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서점으로 보이던 곳에 내걸린 이름은 ‘콜롬보 코너 숍(Colombo Cornershop)’. “Buy and Sell Books, Vintage, Fresh Coffee”라 적힌 차양막 아래 무질서한 듯 정리된 책들의 시간이 과거와 더 과거를 오간다. 여행지에서 서점이나 헌책방을 마주치면 들어가 본다. 낯선 외국어가 주는 불통이 좋아서. 그 사이 이런 광선이 솟아서. 지금 봐도 멋있다는 나의 탄성조차 촌스럽게 느껴지는 시대 불문의 기개 같은.
그사이 도예품을 곁들여 파는 카페에 들어가 그릇 몇 점과 옆집 3층짜리 편집숍을 오르내리며 젓가락 받침대를 사고, 앞서 구매한 책들을 들고 다니느라 금세 허기가 졌다고 변명하겠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찾기 위해 켠 구글맵에서 ‘비건 채식 레스토랑’이라는 소개문을 외면하기 곤란했다. 평소 삼겹살을 사랑하지만, 이국의 비건 채식은 어떤 맛일까 알고 싶었다. 구글맵 리뷰 사진 속 공간은 캐주얼 레스토랑 같은 분위기였는데, 실제로 들어선 그곳은 보다 연식이 느껴지는 동네 작은 식당의 무드다. 나로서는 그래서 더 좋았지만. 초록색 풀과 으깨진 붉은 토마토로 이뤄진 카레 맛은 음, 이런 맛이 있군 싶었지만. 오늘의 수프가 갖춰진 런치 메뉴도, 구석에서 신문을 넘기며 식사하는 동네 아저씨도, 에메랄드색 천장 등도, 왜 있는지 궁금해지는 피아노도 모조리 귀엽다. 어쩌면 이것이 여행이 주는 기쁨 아닐까. 무엇이든 사랑스러워 보이는 여유 그런 것.
사진이라도 대단하면 좋을 텐데 말이다. 부족한 시각 자료 보충을 위해 이들이 운영 중인 인스타그램 정보를 남겨 둔다.
☑ 콜롬보 코너숍 (@colombo_cornershop)
☑ 그린 어스 (@green_earth.vegan)
다시 돌아봐도 내 여행의 흔적은 대개 이런 식이다. ‘카메라 대신 눈으로 봐야 해 → 사진 찍을까 → 눈에 담으니 좋네 → 사진 더 찍을 걸 그랬나’ 오가는 끝에 남는 단출한 앨범. 하여 이 이야기에는 다음 여행에 참고하시라 권하는 유용한 일정도, 줄 서서라도 맛보시면 좋겠는 현지 인기 맛집 명패도, 반드시 인증 샷을 찍으시라 추천하는 사진 명소 리스트도 없었으나, 그러므로 도리어 여러분께 묻고 싶다. 당신의 여정을 듣고 싶다. 내게 여행이란 눈 앞의 순간에 충실하는 연습, 우연히 마주치는 색깔과 냄새와 맛에 집중하는 습관, 다시는 오지 않을 지금을 기록하는 시간. 당신의 여행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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