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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에 외국의 한 도시에 반하는 건 쉽다. 스스로는 이미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아직 취향은 여물지 않았고, 알록달록 엉망진창인 세상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거의 백지상태인 20살을 다채롭게 물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쓰레기통에 그려진 그림과 사랑에 빠진 어처구니없던 순간도, 기차역에서 노숙을 하고 깨서 본 새벽하늘에 운명을 느낀 대책 없는 순간도 다 20살이라 가능했던 낭만이었다. 그중에 나를 가장 오랫동안 강렬하게 쥐고 흔든 순간은 파리에 머문 일주일의 모든 순간이었다. 그렇다. 20살의 나는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너무나도 뻔하게도, 파리에게 완전히 반해버렸다.
다시 말을 하지만 20살에 외국의 한 도시에 반하는 건 쉽다. 어려운 건 그다음이다. 바로 40살이 훌쩍 넘어서까지 그 사랑을 오롯이 간직하는 것. 그 한순간의 떨림을 나는 한순간의 치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만나자마자 반한 도시이니 당연히 그 운명에 순응하여 파리로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방법은 요원했다. 한 도시에 반하는 것과 그 도시에 살아갈 능력을 가지는 건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니 말이다. 동시에 20대 중반이 되면 우리 모두는 압박에 시달린다. 현실에 순응하고, 현실 어디 한구석에 내 자리를 만들어야만 한다는 그런 압박. 나는 그 압박에 순응했다. 파리라는 꿈은 어딘가에 살포시 접어서 넣어두고, 1인분의 몫을 다 하는 어른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꿈은 그렇게 쉽게 접히는 건 줄 알았다.
어떤 꿈은 단박에 접힌다. 사라진다. 잊힌다. 하지만 어떤 꿈은 아무리 꼬깃꼬깃 접어도 새의 날개처럼 자꾸만 펼쳐진다. 공작새의 날개처럼 순식간에 펼치고서 수백 개의 눈으로 나를 지켜본다. 자기의 존재를 자꾸만 각인시킨다. 나의 파리 꿈이 그랬다. 그 꿈을 다독이기 위해 짧은 여행도 떠나보았고, 조금 무리해서 길게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다독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파리라는 꿈은 더 활활 타올랐다. 결국 20년 만에 회사를 그만둔 나는 혼자서 파리로 두 달간 여행을 떠났다.
모두 다 그곳을 파리라 불렀지만, 그 두 글자에 담기지 않는 꿈이 내겐 너무 많았다. 이곳에 도착하고 싶어서 오랫동안 방황한 마음이 내겐 별처럼 많았다. 이곳에 도착하면 이루고 싶었던 나의 모습은 또 얼마나 많았나.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서 어떤 의무도 없는 글을 쓰고 싶었다. 해가 뜨면 집 앞 공원으로 달려나가 끝이 없을 산책을 하고 싶었다. 그 산책 끝에 갓 구워진 바게트를 사서, 받자마자 푹 뜯어먹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좋아하는 그림을 보기 위해서 갔던 미술관에 가고 또 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동네에 단골 치즈 가게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고, 단골 카페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커다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고스란히 보이는 커다란 창문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고, 해야 하는 일이라곤 하루 종일 그 나무를 지켜보는 일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분주한 관광객들 사이에서 그들의 분주함 같은 건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일이라는 표정으로 앉아있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는 20년 넘게 동안 내가 꿈을 꿨지만 한 번도 되지 못한 그 모든 존재가 되고 싶었다. 직접, 파리에서. 매일, 파리에서. 두 달 동안 매일 직접 내 꿈을 이루고 싶었다.
두 달의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야속하게도. 두 달의 시간을 꿈에 쏟아붓는다고 갑자기 근사한 나로 변신하는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다만 20살의 꿈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파리에 다녀왔을 뿐인데 ‘꿈을 기어이 이루고야 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내겐 가장 큰 소득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그 꿈에 스스로를 데려다 놓을 수 있는 결단력이 있는 어른이 되어버렸다니. 그렇다면 다음 꿈은 뭐로 세워둘까. 아무리 오래 걸려도, 앞으로 다시 20년이 걸려도, 나는 내 꿈에 기어이 도착해버리는 사람일 테니, 어떤 꿈을 등대처럼 세워두는 게 좋을까. 이 생각만으로도 이미 나는 또 설렌다. 지금 막 여행 가방을 싸는 사람이 된 기분이다.
근데 왜 파리냐고? 파리의 어떤 점에 반했냐고? 글쎄.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수없이 많이 그 질문을 받았다. 그 질문에 또렷한 답을 내놓고 싶어서 급기야 책 한 권을 써버렸다. <무정형의 삶>. 이 책을 쓰고 나서야 깨닫는다. 사랑에 대해 한 문장으로 답을 내놓을 수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한 문장으로 대답할 수 있었다면 책 한 권이 필요 없었을 거다. 한 문장으로 대답할 수 있었다면 다시 또 그곳에 갈 이유를 찾지 않았을 거다. 그러니까 한 문장으로 대답할 수 없어서 나는 영원토록 파리를 그리워하고, 파리에 도착할 운명인 거다.
'당신에게는 어떤 꿈이 있나요?’ 이런 질문은 너무 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질문에 당신이 진지하게 대답을 하고, 그 대답에 도착할 다짐을 한다면 그때부터 이 질문의 무게는 달라진다. 그리고? 그 꿈을 잊지 않는다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당신이 노력한다면, 그리하여 미래의 어느 날 그 꿈에 도착한다면 당신도 ‘꿈을 기어이 이루고야 마는 사람’이 되는 거다. 그래서 다시 한번 진지하게 묻고 싶다.
"당신은 어떤 꿈에 도착하고 싶나요?"
광고 회사 카피라이터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약 20년간 일했으며, 최근 출간한 '무정형의 삶' 포함 총 7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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