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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은 새 것을 좋아한다. 새 집, 새 차, 새 스마트폰, 새 옷. 나는 스포츠웨어 룩이 한국에서 인기를 얻는 이유는 스포츠웨어 룩 특유의 새옷같은 느낌도 약간의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런 한국 사람들도 기꺼이 입는 낡은 옷이 있다. 데님이다. 데님은 구멍이 나고 색이 바래도 멋있는 옷으로 인정받는다. 찢어진 울이나 찢어진 나일론, 찢어진 고어텍스는 하자다. 유독 데님만 불량이 양품이 되고 해진 것이 멋의 조건이 된다.
데님이 찢어진다는 건 강한 섬유 상태에 뭔가 가공을 한다는 이야기다. 가공을 해도 사람이 입을 수 있는 상태일 만큼 튼튼한 원단이라는 의미다. 튼튼한 소재는 튼튼한 실에서 오고, 튼튼한 실은 튼튼한 원재료에서 온다. 데님은 두꺼운 실을 능직해서 만든다. 튼튼한 원자재여야만 닳았을 때도 멋이 난다. 튼튼하지 않은 소재가 시간의 흐름에 의해 닳는 과정은 급이 높지 않은 채 오래된 와인과 비슷하다. 시간은 모든 싸구려를 무너뜨린다. 소재도 디자인도 사상도. 튼튼한 소재는 시간에 무너지지 않는다. 좋은 데님처럼.
데님 중에서는 일부러 닳게 가공되어 흰색 실이 보이는 청바지들이 있다. 데님은 마냥 파란색이 아닌 걸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능직(twill)이란 개념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능직은 직물을 만드는 방법론 중 하나다. 거창하게 말하면 옷은 실이라는 1차원의 선이 소재라는 2차원의 면이 된 뒤 인간의 몸에 얹히고 감기며 3차원의 형태를 갖는 것이다. 실들이 씨실과 날실로 교차되어 쌓이며 면이 된 것이 직물이다. 씨실과 날실이 1:1로 교차되면 평직, 1:2나 1:3으로 건너뛰듯 교차되면 능직, 1:5 이상으로 많이 건너뛰듯 교차하면 수자직이라 부른다. 데님은 능직이다. 능직을 영어로 하면 트윌(twill), '코튼 트윌'이라 부르는 것들은 데님과 같은 방법론으로 짜인 직물이다.
평직과 능직과 수자직은 모두 상황과 쓰임에 따라 장단점이 다르다. 평직-능직-수자직으로 갈 수록 마찰에 약해지고 주름이 잘 생기지 않으며 광택이 많아진다. 능직이니까 섬유 위에 드러난 실의 면적이 평직보다 넓고, 그만큼 마찰에 약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100% 단점은 없다. 능직은 마찰에 약하나 주름에 강하고 광택이 많다. 데님 특유의 주름과 광택은 바로 이 소재의 특징에서 온다. 다양한 트윌 직물 중 데님의 특징은 '인디고 블루 색으로 염색한 실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직물의 가로와 세로를 이루는 실이 경사와 위사다. 데님은 인디고 블루 색으로 염색한 경사와 흰색으로 표백한 위사를 쓴다. 겉에서 보면 파란색인데 뒤집어서 보면 흰색에 가까운 이유다. 겉에서는 경사의 색이, 안쪽에서는 위사의 색이 많이 보이니까.
사진 1,2) 다양한 색의 데님 원단. 모두 미묘하게 다른 데님 원단의 뒷면. 끝에 보이는 흰색 실이 위사다.
이런 기본 조건 안에서 개별 데님 원단은 무한히 다양해진다. 경사와 위사의 굵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따라 느낌과 쓰임새가 변한다. 실이 얇으면 원단이 얇아져 데님 셔츠를 만든다, 실이 두꺼우면 바버샵 사장님들이 입을 때 쓰는 청바지의 원단처럼 두꺼워져 벗었을 때도 설 만큼 빳빳해진다. 경사를 얼마나 염색할 것인가도 문제다. 진한 파랑으로 하는가 연한 파랑을 하는가에 따라 생지 데님이라도 톤이 조금 다르다. 위사의 세계에도 변수가 많다. 보통 위사를 통해 데님 원단의 편안함을 조절한다. 위사에 스판기가 있는 실을 더하면 데님 원단에도 신축성이 생기고, 신축성이 있는 원단으로 만든 데님이 이른바 '스트레치 데님'이다. 한국은 새것뿐 아니라 편한 것도 좋아하기 때문에 남성들도 스트레치 진을 많이 구입한다.
사진 3) 다양한 데님을 접어서 비교하면 각 원단의 두께 차이가 보인다.
데님처럼 실에 염색을 먼저 해서 직물로 만든 걸 선염이라고 한다. 실 상태에서부터 직물의 상태가 정해진다고 생각하니 운명같기도 하다. 그러나 인생이 그렇듯 섬유와 옷의 세계도 날 때 모양이 전부가 아니다. 데님은 특유의 내구성을 이용해 아주 다양한 종류의 후가공을 한다. 당장 KOLON MALL에 '워싱 진'만 쳐 봐도 (2023년 2월 24일 기준)165개나 되는 워싱 진이 나온다. 무릎 쪽에 넓은 면적으로 닳은 자국이 있고, 허벅지 쪽에는 굵게 접힌 자국들이 보인다. 이 무늬를 만들기 위해 누군가가 며칠 입으며 잠들지 않았을 테니 이 모든 워싱은 조금 더 빤 것 같은 옷을 만들기 위한 데님 제조사의 전략이다. 설사 원단이 덜 예뻐도 후가공을 거친 바지 상태에서 더욱 아름다운 뭔가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인생처럼.
사진 4~7) 사포를 들고 생지 데님을 갈아내기 시작하면 금새 파란색 경사 아래 있는 흰색 위사를 볼 수 있다. 자신이 원할 경우 이렇게 개인화가 가능하다는 점도 데님 원단의 매력 중 하나다.
흥미롭게도 데님의 질감과 후가공의 감각에 대해서는 패션 선진국들이 서로의 꼬리를 쫓는 모양새다. 미국은 리바이스로 대표되는 미 서부 초기 정착자들의 야생적인 이미지로 '청바지'라는 장르를 만들어 초기 데님 진의 역사에 영원히 남았다. 일본인들은 미국 청바지를 아주 열심히 계승했다. 일본인 특유의 꼼꼼함과 물입으로 미국의 오래된 데님을 재현하는 청바지들을 만들어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데님 생산의 노하우가 생기고, 그 결과 오카야마 데님처럼 브랜드 수준으로까지 소재의 급이 올라갔다.
유럽도 데님의 분화에 나름의 힘을 보탰다. 일본인들의 노하우를 유럽으로 가져가서 재미를 본 게 APC의 장 뚜이뚜다. 그는 인디고 염색을 워싱하지 않은 생지 소재로 유럽풍의 세련된 스트레이트 청바지인 '뉴 스탠다드'를 만들었다. 그건 이름처럼 20세기 말엽 청바지 세계의 뉴 스탠다드가 되었다. 늘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이탈리아는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최고로 만들어 세계의 인정을 받는다. 그게 디젤 데님이다. 디젤 특유의 정교한 워싱과 색채는 아무 브랜드나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사진 8,9) 데님 원단을 조금씩 잘라둔 모습. 잘라놓고 보면 입은 듯 물이 빠진 데님도 있고 빳빳한 생지 데님도 있다.
지금 이 모든 데님 게임의 플레이어들은 새로운 숙제를 맞았다. 과목 이름은 친환경이다. 워싱은 필연적으로 많은 양이 물이 더러워지는 과정이다. 후처리를 잘 해도 물이 오염된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요즘은 물 대신 레이저로 워싱을 하는 데님들이 생기는 추세다. 물을 쓰지 않으니 엄밀히 말해 '워싱'이 아니지만 지금 거의 모든 글이 키보드로 쳐지고 있을 텐데도 글을 '쓴다' 고 표현하니, 워싱 역시 그런 개념으로 살아남는 어휘라고 보면 되겠다.
"(데님은)옷에 시간성을 드러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소재니까요." 이번 원고에 큰 도움을 준 디자이너 A에게 '데님을 좋아하냐'고 묻자 저렇게 멋있는 답이 돌아왔다. 그 말대로다. 우리가 닳은 데님을 입고, 생지 데님을 사서 닳을 때까지 입는 건 거기에 쌓인 시간이 멋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멋을 위해 어떤 사람들은 생지 데님을 입고 욕조에 들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빈티지 가게를 하염 없이 찾아다닌다. 실이 1차원, 직물이 2차원, 옷이 3차원이라면 시간이 묻어 나는 옷은 4차원까지 반영된 옷이다. 아무리 새것이 좋아도 우리 모두 나이가 든다. 내 삶처럼 자연스럽게 낡아가는 데님이 그래서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모든 건 리바이스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세기 동안 세뇌 실험을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입다 보면 닳고, 밝은 색 의자에 묻어 나고, 뻣뻣하고, 다른 옷과 함께 빨 수 없는 이 옷을 대체 왜 사 입는가... 라고 생각하는 나도 여전히 수많은 청바지를 갖고 있으며 거기 더해 종종 청바지를 산다. 그게 데님의 매력인 것 같다.
정보를 찾고 정리해 페이지를 만듭니다. 2023년에는 잡지사 에디터로 일하며 각종 매체에 원고를 기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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