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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당신과 이집트 미이라와 <플란다스의 개> 네로의 공통점이 있다. 린넨을 입는다는 점이다. 영화나 박물관에서 많이 본 미이라의 붕대 소재가 린넨이다. 네로가 꿈을 품고 그림을 그리며 입던 옷도 린넨이다. 그동안 인류는 내세의 영생을 위해 내 몸을 미이라로 만드는 대신 내 삶의 조각을 ai로 모아 별도의 영상 파일을 만드는 정도로 발전했다. 네로가 평생 보고 싶어 했던 루벤스의 그림도 이제는 검색하면 어디 서나 볼 수 있다. 반면 린넨을 만드는 방법 자체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인류가 린넨을 처음 만들었다고 알려진 약 6000년 전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보면 섬유와 의류 산업의 유구한 역사를 깨닫게 된다.
린넨은 실제로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오래 된 직물로 손꼽힌다. 인간은 언제나 몸에 덮거나 두를 게 필요했으니 초기의 섬유 소재는 자연에서 올 수밖에 없었다. 자연 소재라면 둘 뿐이다. 동물 아니면 식물. 린넨은 면과 함께 대표적인 식물성 소재다. 린넨의 원료는 아마(亞麻/flax), 우리는 모시 등으로 쓰는 마(麻)의 한 종류다. 식품점에서 판매하는 '아마씨유'의 그 아마다. 아마의 주산지는 서유럽이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카톨릭 성유물인 '토리노의 수의' 소재 역시 린넨이다. 미이라와 토리노의 수의와 린넨을 생각하면 린넨과 유럽/지중해 문명권의 연관성을 엿볼 수 있다.
오래된 소재답게 린넨을 만드는 방법도 옛 방식과 큰 차이가 없다. 특히 아마에서 린넨 실이 되기까지의 절차는 비슷할 것 같다. 린넨의 원료가 되는 아마를 심는다. 아마가 자랄 때까지 그대로 둔다. 아마가 다 자라면 수확한다. 수확한 아마를 부드럽게 만든 뒤 실로 뽑아낸다.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 똑같이 내려오는 린넨 만드는 방법이다. 린넨의 역사적인 산지 역시 여전히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방이다. 플랑드르Flandre는 벨기에와 네덜란드에 걸쳐 있는 '플란데런Vlaanderen' 지방을 프랑스어로 읽은 것이다. 플랑드르를 영어로 읽으면 '플랜더스Flanders'가 된다. 플란데런->플랑드르->플랜더스...뭔가 느낌이 온다면 바로 그거다. <플란다스의 개>의 그 '플란다스'가 이 동네 이야기다. 네로가 입고 다녔을 만하다.
린넨을 만드는 방법은 농사에서 시작한다. 아마는 밭 작물이다. 봄에 파종해 여름까지 기다린다. 아마 농사는 짓기 별로 어렵지 않다고 한다. 씨를 뿌리고 기다려 두면 아마는 잘 자란다. 봄부터 여름까지 4개월 가량 기다리면 아마는 1m까지 자라고 꽃이 핀 뒤 씨가 맺힌다. 그 아마를 베어내면서 린넨 제조가 시작된다. 씨는 따로 모아서 아마씨유 등으로 따로 활용하고, 아마는 일단 베어서 그대로 둔다. 왜 그대로 두냐고? 아마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다.
자연 상태의 아마를 보면 섬유를 얻기 위한 인간의 노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아마에서 린넨이 되는 과정은 말 그대로 지푸라기가 실이 되는 과정이다. 아마는 겉보기에도 상당히 억세 보인다. 수확할 때쯤이 되어도 꼿꼿하게 서 있다. 그래서 린넨을 만드는 공정을 보면 산지에 따라 조금씩 다른 방법으로 수확한 아마 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걸 볼 수 있다. 벨기에에서는 수확하고 나서 일부러 땅 위에 그대로 둔다. 아일랜드에서는 물에 담가 두기도 한다. 아마 줄기는 상당히 억센지 이렇게 해도 여전히 거칠다. 이렇게 거친 줄기로 천을 만들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싶어진다.
거친 걸 부드럽게 만드는 게 문명이다. 아마 줄기 역시 인간의 생각과 시간을 거쳐 점점 부드러워져 간다. 물에도 담가 두고 땅에도 그대로 두었으니 부드러워질 수밖에 없다. 보통 잎이나 줄기라면 그냥 뭉개질 법도 한데 여전히 질기다는 점에서 아마의 내구성을 확인할 수 있다. 부드러워진 아마 줄기는 본래의 초록색을 지나 지푸라기의 황금빛보다 조금 짙은 연하고 탁한 갈색을 띠게 된다. 이 아마 줄기를 꾸준히 빗질하듯 벗겨내면 아마 줄기에서 아마 원사가 된다. 이 아마 원사를 이어 린넨사를 만들고, 이 린넨사를 직조해서 린넨 천이 만들어진다.
린넨의 장점은 명확하다. 튼튼하고 시원하다. 지푸라기를 말리고 잘게 쪼개 빗질을 했는데도 부서지지 않고 린넨 원사가 된 셈이니 내구성은 익히 짐작할 수 있다. 보존이 잘 된 린넨은 미이라나 토리노의 수의에서 볼 수 있듯 몇 천 년을 가기도 한다. 지푸라기인 만큼 몸에 잘 달라붙지도 않기 때문에 촉감이 시원하고 자연 소재인 만큼 통기성도 좋다.
이런 린넨의 매력이 잘 드러나는 영화가 1999년작 영화 <리플리>다. 영화의 배경은 19950년대 이탈리아고, 이탈리아 남자들은 린넨을 잘 입는 걸로 유명하다. 각 등장인물은 각자 캐릭터가 가진 개성에 맞춰 휴양지 차림을 선보이는데, 영화에서는 주드 로가 그림 같은 린넨 룩을 입고 나온다. 흰색 린넨 바지나 연분홍색 린넨 반바지는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영화 속 배경을 생각하면 린넨 옷이 단순히 멋만도 아닐 것이다. 유럽의 여름은 정말 덥고 유럽은 오래된 건물이 많아 에어컨이 없는 경우가 많다. 조금이라도 덜 불쾌할 옷감을 입을 이유가 아주 많다.
린넨의 단점도 장점만큼 명확하다. 대표적으로 린넨은 잘 구겨진다. 린넨의 구겨짐이 '자연스러운 주름의 멋스러움'같은 말로 포장될 정도다. 아닌 게 아니라 100% 린넨 재킷을 입다 보면 생기는 주름에는 실로 자연스러운 멋이 있다. 반면 개인의 기호나 상황상 린넨의 주름이 조금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미묘한 뉘앙스 이야기긴 하지만 린넨 옷을 뺴 입은 남자를 보면 '아유 너무 멋 부렸다' 싶은 것도 사실이다.
멋부린 린넨남이 되는 것도 나쁠 것 없다. 린넨 옷을 잘 입는 방법 역시 영화 <리플리>에 나와 있다. 여유 있는 실루엣과 당당한 자세. 특히 구김 따위 상관없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다만 여유는 늘 준비에서 온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린넨은 다렸을 때 구김도 잘 펴진다. 잘 다려 입고 나간 뒤 일단 입고 나가면 구겨지든 말든 당당하게 다니는 것. 주드 로가 알려주는 린넨을 멋있게 입는 방법이다. 자신이 멋부린 린넨남이 되고 싶지는 않으나 린넨의 호사스러운 감촉을 느끼고 싶다면 린넨 침구를 쓰는 것도 좋다. 촉감이 시원하고 통기성이 좋으니, 린넨 침구야말로 이 여름의 럭셔리일 수도 있다.
린넨은 지금 시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직물 중 하나라 본다. 린넨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여전히 전통적이지만 시대가 변함에 따라 시대적 요구 역시 변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효율과 산업화와 기능성 등 근대 자본주의를 이끌어온 키워드들이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 앞에서 숨을 돌리는 시대다. 린넨의 지속가능성은 말할 것도 없다. 린넨의 소재인 아마는 말 그대로 농작물이다. 염색하지 않은 린넨은 제조 공정에서 환경에 악영향을 미칠 소지가 없다. 아울러 린넨은 살에 잘 달라붙지 않는 여름 소재다. 냉방을 줄이고 린넨을 입어서 지구온난화에 대응하자는 것도 말이 된다. 아울러 린넨 등 각종 직물과 섬유에서는 인체에 해가 없이 만들어졌음을 증명하는 다양한 인증 제도가 있다. 요즘의 고급 의류 중에서는 이렇게 인증된 고급 소재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소재의 무해함을 인정받은 소재까지 써야 하다니, 고급품 만들기는 어려운 일이다.
오늘날 린넨이 쓰이는 방식은 그야말로 과거와 현재가 만나 미래가 되는 모습 그 자체다. 린넨 100%로 만든 의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찾아보기 힘든 대신, 오늘날의 린넨은 여러 소재와 함께 쓰인다. 린넨을 면이나 울과 섞어 각 원단의 장점이 모인 하이브리드 원단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린넨과 폴리에스테르를 섞어 원단을 만들면 린넨의 시원한 장점을 가져오면서도 주름을 줄일 수 있다. 폴리우레탄을 섞으면 린넨에 없던 신축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수천년 동안 전승된 인류의 지혜와 20세기의 섬유화학이 만나서 오늘날의 '린넨 블렌드'가 만들어진 셈이다. 기술의 발전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린넨 천의 까슬까슬한 촉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원고를 작성할 때쯤 두바이에 출장을 다녀 왔다. 두바이도 1년 내내 더운 나라다. 전 세계에서 온 저널리스트들이 각자의 상황에 맞는 비즈니스 캐주얼 차림새로 참가했다. 그 중 단연 눈에 띄는 분은 역시 이탈리아인. 상의와 하의 모두 여유 있는 실루엣의 린넨 바지와 셔츠를 입고 있었다. 역시 염색하지 않았고, 역시 실루엣은 여유가 있었고, 역시 잘 다려져 있었으며, 역시 곧 구겨질 것이었으나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시대가 린넨을 부르기도 하고, 린넨 룩은 시대를 초월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정보를 찾고 정리해 페이지를 만듭니다. 2023년에는 잡지사 에디터로 일하며 각종 매체에 원고를 기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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