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KOLONMALL. ALL RIGHT RESERVED
"사랑스러운 밤을 낭비하다니(what a waste of a lovely night)"
한국에서도 크게 인기였던 2016년작 <라라 랜드>에서는 폴리에스테르를 언급하는 구절이 있다. 영화 초반,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과 미아(엠마 스톤)이 역사적인 첫 춤을 추기 시작하기 전의 장면이다. 둘의 뮤지컬 스코어 ‘러블리 나이트’에서, 세바스찬이 1절 말미의 노랫말로 사랑스러운 밤이 날아간다며 이죽거리자 미아 역시 2절의 첫 가사로 화답한다.
"그 말은 내가 해야 할 것 같은데, 폴리에스테르 수트를 입은 당신이 귀엽긴 해도(I think I'll be the one to make that call, And though you look so cute in your polyester suit)"
이 가사에 세바스찬은 "울인데." 라며 즉시 말대꾸한다. 이런 대사는 왜 나왔을까?
헐리우드 대형 창작물의 디테일이 여기서 나온다. 영화 초반에는 미아나 세바스찬이나 LA에서 자리를 못 잡은 청춘들이다. 자리를 못 잡은 젊은이들이니 당연히 좋은 옷을 입기 힘들다. 미아는 그 부분을 짚은 것이다. (저렴한+그래 보이는) '폴리에스테르 수트'라는 말로. 세바스찬 역시 "울이야" 라고 발끈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런 대화를 나누며 춤을 추던 미아의 옷 소재 역시 폴리에스테르다. 이 역시 헐리우드 대형 창작물의 스케일이다. 꿈을 찾는 젊은이인 것, 돈이 없는 것, 이 모두 미아도 마찬가지다. <라라랜드>의 코스튬 디자이너 마리 조프레스는 <패셔니스타>기사에서 캐릭터의 디테일을 위해 그 옷은 폴리에스테르 원단으로 만들었다고 이야기했다. 폴리에스테르가 뭐길래.
폴리에스테르는 저렴한 섬유다. 화학 소재이기 때문이다. 양털(울)이나 목화(면), 아마(리넨)등으로 만드는 천연 소재와 달리 폴리에스테르는 원유에서 정제된 테레프탈산(TPA, Terephthalic Acid)을 원료로 만든다. 이를 원료로 섬유를 만들어 실로 뽑아낸 후 직조하면 폴리에스테르 원단이 된다. 20세기의 의류 역사 한 켠에는 폴리에스테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폴리에스테르는 나일론과 비교해 이해하면 쉽다(그러므로 이 내용은 훗날 나일론 편에서도 비슷하게 등장할 것이다). 합성 섬유는 천연 섬유의 대체제 성격을 띤다. 나일론은 비단의 대체제, 폴리에스테르는 양털의 대체제다. 그래서 폴리에스테르로 만든 원단이 울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그 결과 미아가 세바스찬에게 '너의 폴리에스테르 수트' 라고 비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폴리에스테르가 처음 만들어진 나라도 영국이다. 1950년 영국 임페리얼 케미컬 인더스트리(ICI)가 공업화에 성공했다. 영국권 국가들은 양털을 많이 생산하기도 하니, 영국에서 폴리에스테르가 만들어진 것도 이해가 간다.
폴리에스테르가 미국에 들어온 계기도 라라랜드와 약간의 연관이 있다. 폴리에스테르를 처음 미국에 유행시킨 디자이너 에디트 플래그가 LA의 패션 디자이너다. 에디트는 1950년대 당시 별로 알려져 있지 않던 폴리에스테르를 영국에서 들여와 드레스를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때 옷들은 아직도 빈티지 시장에서 거래되는데, 이미지를 찾아보면 미아가 <라라랜드>에서 입고 나온 옷과 큰 차이가 없다. 패션은 돌고 돈다는 말이 이래서 나왔구나 싶다.
요즘 많이 입는 기능성 폴리에스테르 내의의 원단을 확대해서 촬영한 모습. 모두 조금씩 원단의 짜임이 다른 걸 볼 수 있다.
1. A사 에어리즘. 셋 중 가장 가볍다. 폴리에스테르 88%(재생54, 비재생34), 폴리우레탄 12%
2. B사 쿨테크. 셋 중 가장 싸다(정가 기준). 폴리에스테르 87%, 폴리우레탄 13%
3. 코오롱스포츠 에코메이드 러닝셔츠. 셋 중 가장 성기다. 폴리에스테르 91%, 폴리우레탄 9%
폴리에스테르가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는 분야는 운동용 의류 분야다. 미아의 원피스와 세바스찬의 수트(세바스찬은 아니라고 했지만)는 그 사용처의 일부일 뿐이다. 100% 폴리에스테르 원단이 아니어도 면이나 울과 섞어 짠 폴리에스테르 원단도 많다. 아울러 폴리에스테르는 운동복에 많이 쓰인다. 헬스장이나 운동 유니폼이나 등산복으로 입는 번들번들한 광택감의 옷은 거의 다 폴리에스테르다. 폴리에스테르에는 신축성이 없기 때문에 신축성을 위해 약간의 폴리우레탄을 섞는다. 스포츠의 종류만큼 폴리에스테르 원단의 사용처도 다양하다.
폴리에스테르가 운동복에 적합한 이유 중 하나는 가볍고 땀이 잘 마르기 때문이다. 복수의 실험 결과 폴리에스테르는 보통 면보다 2~4배 정도 빨리 마른다. 대신 폴리에스테르 섬유는 흡습성이 낮다. 수분을 흡수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폴리에스테르 원단은 몸이 땀을 흘렸을 경우 배출하기가 어렵다. 땀 배출이 어려운데 어떻게 운동복에 쓸까? 공학은 언제나 답을 찾아내기 때문에 멋지다. 운동복에 쓰는 폴리에스테르 원단은 땀 배출을 위해 성기게 직조한다. 섬유가 습기를 흡수하지 못하니 원단 제조 과정에서 습기가 빠져나가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여름 폴리에스테르는 평소에 운동을 자주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유용하다. 요즘 많이 입는 기능성 이너웨어의 소재가 폴리에스테르다. 역시 탄성을 위해 약간의 폴리우레탄을 섞으나 주 성분은 폴리에스테르다. 기능성 이너웨어의 특징이라 일컬어지는 속건성, 냉간성 등에는 섬유 신기술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의 신기술이란 폴리에스테르를 얇고 가볍게 만드는 기술이다. 폴리에스테르 섬유를 얇게 빼내야 얇은 섬유를 만들 수 있다. 얇은 섬유는 가벼운 무게로 이어지고, 가벼운 무게는 그만큼 가벼운 착용감으로 이어진다. 한국소비자원의 '스포츠 티셔츠 품질 시험 결과 보고서'와 '기능성 이너웨어 품질 시험 결과 보고서'를 대조해 보면 보통 기능성 이너웨어가 30% 이상 가볍다. 실제로 오늘 보여주는 의류의 단면들 역시 속건성 폴리에스테르 섬유다. 실은 얇고 조직이 성긴 걸 볼 수 있다.
폴리에스테르는 옷 말고도 많은 물건의 원료가 된다. 폴리에스테르의 원료인 TPA(Terephthalic Acid)는 플라스틱의 일종이고, 그만큼 많은 제품의 원료로 쓰일 수 있다. 의류 소재는 물론 디스플레이용 필름이나 PET 병, 엔지니어링 플라스틱까지 모두 광의의 폴리에스테르 소재다. 재활용 플라스틱 병을 버리면서 '이게 다 어디로 가나' 싶을 때가 있는데, 일정 부분은 옷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는 상식 수준에 속하지만 생각할수록 신기한 일이기도 하다. 투명한 PET병과 여름 기능성 이너웨어의 소재가 같다니. 공학이야말로 현대 문명의 연금술이다.
공학과 쓸모와 욕망을 이어주는 것이 현대 패션 산업이다. 신소재 폴리에스테르의 쓰임을 찾은 디자이너들 덕에 폴리에스테르는 여름 원피스와 스포츠 유니폼의 소재로 만개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기능성 의류의 소재가 되어 더운 여름을 견디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크게 보면 인류는 계속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 <라라랜드>도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미아는 세바스찬의 수트가 폴리에스테르라고 놀렸고 세바스찬은 울이라며 발끈한다. 실제로 세바스찬은 울을 입었을 것이다. 사라지는 재즈를 지키려는 열정이 있었고, 그 캐릭터처럼 영화 속에서 낡은 차를 타고 빈티지 시계를 찼고,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사랑을 잃은 뒤에도 결국 홀로 남아 재즈 바의 주인이 되었으니까.
그러는 동안 미아는 성공했다. 젊을 때 입던 저렴한 폴리에스테르 드레스를 입지 않아도 된다. 마리 조프레스는 <베너티 페어> 인터뷰에서 스타가 된 미아가 세바스찬의 재즈 바에 들어갔을 때 입은 네이비 드레스는 디자이너 브랜드 것이라고 했다. 과거의 유산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오늘날의 세계에서 오늘의 방식으로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다. 폴리에스테르도 그와 같다. 울의 저렴한 대체품으로 쓰이다 이제는 섬유 공학의 발전에 힘입어 대체 불가능한 매력을 가진 소재가 되었으니까.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이 폴리에스테르를 입을 것이다. 가볍고 시원하니까.
정보를 찾고 정리해 페이지를 만듭니다. 2023년에는 잡지사 에디터로 일하며 각종 매체에 원고를 기고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댓글을 달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