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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같은 날씨에 말론 브란도의 1953년 출연작 <위험한 질주>는 보기만 해도 덥다. 이 영화는 완성도보다는 말론 브란도가 입고 나온 '룩'으로 기억된다. 모터바이크와 라이더 가죽 재킷. 그때나 지금이나 모터바이크는 젊음과 자유의 상징이었다. 몇 년 뒤 1960년대에 유행한 영국 모드족의 베스파도 유명했다. 베스파를 타던 모드족은 몸에 달라붙을 정도로 딱 맞는 정장 위로 미군 방한 외투를 걸쳤다. 한국에서도 매년 '개파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는 미군 방한의류 M-51 재킷이다. 라이더 가죽 재킷과 M-51의 공통된 디테일을 아실런지? 지퍼다. 큼직한 금속 지퍼.
<위험한 질주>의 말론 브란도와 모드족
지퍼는 의류 역사의 숨은 게임 체인저다. 지금은 온갖 의류에 지퍼가 있는 게 당연하지만 지퍼는 결코 당연한 게 아니다. 지퍼가 의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이유는, 모든 의류가 사람의 몸에 입혀질 때는 어딘가 열렸다 잠기는 부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옷이 효율적이며 효과적으로 사람의 몸에 걸쳐지려면 잠깐 열렸다 잠기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지퍼 전의 옷들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지퍼 전에는 단추로 옷을 여몄고, 한복처럼 옷이 여며지는 부분을 끈으로 묶어 마무리한 옷도 있었다.
라이더 재킷과 모드족이 둘 다 지퍼 달린 외투를 입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람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옛날 방식으로 여미는 옷에도 고유한 아름다움과 가능이 있으나 말론 브란도나 모드족들이 바이크를 타며 입기에는 추웠을 것이다. 바람이 숭숭 들어오니까. 옷을 여미는 부자재 중 지퍼보다 방풍 성능이 좋은 건 없다. 점차 기능화하는 현대 의류에는 지퍼가 꼭 필요하다. 지퍼가 의류를 넘어 텐트나 시트, 수납 등 기능성 제품에까지 널리 쓰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1) 빈티지 미군 군복에서 볼 수 있는 아이디얼 지퍼. 여전히 튼튼하다.
2) 역시 빈티지 미군 군복에서 볼 수 있는 스코빌 지퍼. 다양한 지퍼가 달려 있기 때문에 지퍼를 보는 애호가들도 있다.
혁명적인 제품들은 혁명적이기 때문에 고안 초기부터 바로 보급되지는 않는다. 혁명적이기 때문에 완성도를 갖추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지퍼도 그랬다. 지퍼의 특허 기록은 1850년대부터 남아 있으나 오늘날의 지퍼라 할 만한 모양을 갖춘 건 1900년대 초반 부터다. 당시 웨스팅하우스 엔지니어였던 스웨덴계 미국인 기데온 순드벡(Gideon Sundbäck)이 지퍼 회사로 이직한 뒤 현대 지퍼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안정적인 엔지니어로 일하던 기데온은 왜 당시 스타트업에 가까운 지퍼 회사로 이직 했을까? 지퍼 회사 사장의 딸인 엘비라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퍼가 보급된 데에는 기데온의 사랑도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다.
기데온이 사위로 일하며 발전시킨 지퍼 회사는 아직도 남아 있다. 이름만 바꿨다. 그 회사가 탈론(Tallon)이다. 탈론은 오늘날까지 건장한 세계적 지퍼 회사이며, 옷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품질을 증명하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퍼는 자동차의 타이어처럼 의류에 쓰이는 부자재 중 직접 브랜드 이름이 보이는 특징이 있다. 그와 비슷한 개념의 고급 지퍼로는 스위스의 리리(riri), 이탈리아의 람포(lampo)등이 있다. 디자인이 한정되어 있어 제작 기술과 원부자재로 승부를 보는 고가 남성 의류에서 부자재 이야기를 많이 한다.
탈론의 플라스틱 지퍼. 금속 지퍼 헤드에 원단 색과 같은 플라스틱 레일을 써서 금속 헤드의 질감만 남겼다.
지퍼는 품질의 증명일 뿐 아니라 고고학 유물의 탄소동위원소처럼 특정 제품의 나이를 증명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군복이나 라이더 재킷 등 옷의 연식이 빈티지로 인정받는 장르의 옷이 있다. 그런 옷의 연차 혹은 출신지 구분 요소 중 하나가 지퍼다. M-51 파카에 탈론 지퍼가 들어갔느냐, 크라운(Crown) 지퍼가 들어갔느냐 하는 식이다. 칙칙한 아저씨풍 빈티지 의류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루이비통이나 에르메스 역시 시대별로 조금씩 지퍼 제작자를 달리 했다. 예를 들어 에클레르(Eclair)지퍼를 쓴 루이비통이나 에르메스는 연식이 좀 된 빈티지다. 이런 걸 들여다보는 것도 의류 생활의 작은 재미다.
지퍼의 좌우를 이루는 레일 소재로도 지퍼를 구분할 수 있다. 실생활에서는 이게 더 요긴할 것이다. 레일의 소재는 크게 셋이다. 하나는 금속. 보통 알루미늄이나 브라스를 쓰기 때문에 바로 알아볼 수 있다. 지퍼를 열고 닫을 때도 '카라랑'에 가까운 (당연히) 금속성 소리가 난다. 앞서 말한 탈론이 최초 개발사이며 아직도 유명하다. 플라스틱 레일을 쓴 지퍼도 있다. 직물 테잎(긴 천)위에 플라스틱 사출 레일을 달아 길게 붙인 방식이다. 열고 닫을 때는 '드르륵'느낌의 소리가 난다. 보통 스포츠 느낌 의류 혹은 옷에 많이 쓴다. 마지막으로 코일 레일이 있다. 폴리에스테르 단선을 코일 형태로 성형해 붙였다. 1951년 독일의 OPTI가 개발했고, 개발 당시에는 가볍고 강력해서 평판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열고 닫을 때는 셋 중 가장 가벼운 '지익' 소리가 난다.
1) YKK의 금속 지퍼. 금속 지퍼가 지퍼의 방법론 중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2-3) YKK의 플라스틱 지퍼와 코일 지퍼. 지퍼 세계 점유율 1위인 만큼 만드는 지퍼 종류가 다양하다.
레일 소재에 따른 3가지 지퍼를 보면 세상에 완벽한 건 없다 싶어진다. 금속 레일은 실질적으로 튼튼하고 보기에도 견고한 대신 금속 지퍼의 색을 바꿀 수 없어서 지퍼 자체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지퍼의 존재감을 숨겨야 하는 검은색 여성 원피스의 등 지퍼로는 쓰기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는 조색이 자유로운 코일 지퍼를 많이 쓴다. 그러나 코일 지퍼는 우리 모두 겪은 적이 있듯 코일이 얇기 때문에 레일에 손상이 가서 '이 빠진'지퍼가 될 수 있다. 플라스틱 지퍼 역시 모든 상황의 대안이 될 수 없다. 가볍고 저렴한 대신 지퍼 자체의 존재감이 세서 아무 의류에나 쓰기 어렵다. 플라스틱 사출물이니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나 레일 사출물인 만큼 개별 크기가 조금 커서 의류에 쓰면 티가 많이 난다. 지퍼 세계에서도 이 세 종류의 지퍼가 각자의 균형을 맞춰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지퍼 역시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탈론은 금속 지퍼를 만들어 한때 세계 지퍼 점유율이 90%에 이를 정도였다. 독일의 OPTI 지퍼 역시 처음 나왔을 때는 혁명적인 발명품이었다. 그러나 지금 세계 지퍼 시장 최고 점유율을 가진 회사는 이들이 아닌 일본의 YKK다. YKK는 지금 현재 세계 지퍼 시장 점유율의 45%를 차지한다. 압도적 1위. 비결은 품질이다. YKK의 높은 품질에는 1200개의 관련 기술이 적용되어 있다고 한다. 무심코 쓰는 지퍼에도 YKK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확률이 높다.
파우치에 쓰인 코일 지퍼. 지퍼는 이제 옷을 넘어 개폐가 필요한 수납 제품이나 공간에 모두 자주 쓰이는 추세다.
의류 등 소비재 제조업이 계속 재미있고 신기한 이유는 여러 요소가 교차하기 때문이다. 지퍼 기술은 오래된 기술이지만 방수 지퍼 등으로 계속 발전하는 중이다. 의류 산업은 신소재와 신공법 등 대단한 하이테크를 받아들이는 한편 여전히 사람이 손으로 꿰매는 경공업적 요소를 갖고 있다. 이른바 패션이라 부르는 것들은 기상이변처럼 알 수 없는 순간의 유행이 좌우하면서도 길게 보면 공예와 현대미술의 흐름을 따르는 면이 있다. 보는 방법에 따라, 내가 아는 지식에 따라 여러 가지 요소를 찾아낼 수 있는 게 현대 의류 생활의 재미 아닐까. 지퍼 역시 그 실마리 중 하나다.
어떤 지퍼가 좋은 지퍼냐는 질문은 답하기 애매하다. 요즘 지퍼의 품질은 상당히 상향 평준화 되었다. '어떤 지퍼가 좋냐'는 질문보다는 '지퍼를 알아 두었을 때 무엇이 좋으냐'는 질문이 조금 더 적합하겠다. 지퍼를 알아두면 옷을 고를 때 좋다. 의류 부자재의 품질이나 완성도는 결국 의류의 완성도와 비례할 때가 많다. 즉 품질에 신경 쓴 의류라면 앞서 말한 유명 브랜드의 지퍼를 쓰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지퍼를 통해 옷의 품질을 가늠하거나, 신생 브랜드의 옷을 볼 때 '이건 가격에 비해 좋은 지퍼를 썼으니 성의 있게 만들었군' 같은 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스위스의 리리 지퍼. 요즘은 보기 쉽지 않지만 만져 보면 느낌이 다르다. 조금 다르지만 확실히 다르다.
한번쯤 지퍼를 만져볼 때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해보길 바란다. 전기 회사 엔지니어를 그만두고 사랑을 찾아 떠나 지퍼를 발전시킨 순드벡도 한번, 말론 브란도의 라이더 재킷에 달려 있던 지퍼도 한번. 방금 여러분이 여닫은 지퍼 레일 하나에도 수많은 이야기들이 매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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