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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가야 할 것 같은데요." 지난번 광양훼더를 다녀오고 우리의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다음 취재 주제는 신발이다. 신발 공장은 다 부산에 있다. 그러니 부산에 가야 했다. 제조업의 현장을 보기로 한 이상 당연하다. 이제 서울은 물론 수도권에서도 대형 제조업 공장을 찾기 어렵다. 부산으로 갈 날짜를 잡고 주소를 받았다. 촬영 집결지로 받은 주소는 외지 사람들이 부산 여행에 전혀 갈 법하지 않은 곳이었다. 부산지하철 2호선 감전역 3번 출구에서 내려 사상구청과 북부산세무서와 근로자들이 갈 법한 국밥집과 밀면집을 지나자 오늘의 목적지가 나왔다. 천일상사. 코오롱스포츠의 신발 제품을 제조하는 공장 중 하나다.
"아~지난번에 캠브리지 써준 거 잘 봤어요." 라고 말하는 박규선 팀장과 주차장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지금 부산에서 코오롱 산하 브랜드들의 신발 생산을 관리하는 중이다. 평소에도 박식하시다는데 입담 역시 대단했다. 평생 부산에 연고도 없고 살아본 적도 없고 롯데자이언츠도 응원하지 않는데(대신 LG 트윈스 팬이고, 결혼 이후 LG트윈스가 우승을 못해서 올해를 무척 기대하고 계신다고 했다) 회사 일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우리를 환대하고 공장에서 준비해 준 비타 500 한 병을 마신 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공장을 둘러보기 전에 이 정도 이야기는 미리 알아야 신발 제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어요." 라는 이유였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런 말로 정리할 수 있어요. 의류는 봉제, 신발은 제조에요." 박규선이 해준 말이 신발 제조의 특징이자 의류 생산과의 가장 큰 차이였다. 그의 말은 녹음해두었다가 그냥 원고로 적어도 상관없을 만큼 정보가 풍부하고 주장에 대한 근거가 확실했다. 봉제와 제조의 차이를 요약하면 원재료 종 수와 전문 인력의 차이다. 그는 여러 브랜드 관리를 해 봤기 때문에 각 생산의 차이에도 능통했고, 그렇기에 봉제와 제조공장의 차이는 그와 같은 사람이 알 수 있는 특수한 분석이었다. "봉제 공장은 원재료의 95% 이상이 원단이에요. 다른 건 단추나 지퍼 등의 부자재 정도겠죠. 하지만 신발은 다릅니다." 무엇이 다를까.
1. 운동화 밑창의 소재별 장단점을 설명해주는 박규선 팀장의 손.
2. 천일상사는 코오롱스포츠 신발제품을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 한켠에 코오롱스포츠 박스가 보인다.
재료의 종류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산업 도시에는 특산품이 있다. 해당 지역에 특정 산업의 규모가 커지면 그 산업과 관련된 여러 업체들이 한 지역에 모인다. 예를 들어 대구에 치킨이 많은 것도 그런 이유다. 완제품 치킨을 이루는 여러 재료인 튀김 가루나 소스 등의 업체들이 대구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 신발도 마찬가지이며 특히 운동화 류는 조금 더 까다롭다. 신발 하나를 이루는 요소인 갑피, 바닥, 끈 등은 모두 다른 공장에서 만들어진다. 신발 공장은 이 모두를 조립하는 공장이다. 자동차 공장처럼. 그렇기 때문에 신발 공장 역시 일종의 생태계를 이루고, 그 생태계가 모여 있기 때문에 신발에 강한 도시라는 게 생긴다. 그게 부산이고, “그래서 신발을 제조라고 하는 겁니다. 다양한 부품이 신발 공장에서 모여 조립되니까요. 각 조립 과정에는 특수 공구가 있고, 그래서 신발은 장치산업에 가깝습니다.” 박규선 팀장의 정리는 깔끔했다.
1. 샘플 제작을 위해 보유하고 있는 원단들.
2. 샘플 패턴을 자를 때는 칼로 직접 자른다. 소량 생산 단계이기 때문이다.
3. 토대로 신발이 잘 만들어질 수 있는지 확인해보는 제조 샘플.
그 사이에서 그는 단순 생산관리를 넘어서는 일을 찾아냈다. 테크니컬 디자이너다. 테크니컬 디자인은 크리에이티브 디자인과 구분되는 개념으로, 크리에이티브 디자이너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현실화 시키는 일이다. 그는 산업도시의 현장에 있기 때문에 역으로 크리에이티브 디자이너에게 '이런 게 현실화 가능하다'라는 제안을 할 수 있다. 신발의 밑창을 만드는 틀(몰드) 중 누구나 쓸 수 있는 '오픈 몰드'가 있다면 그 몰드를 디자이너에게 제안하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테크니컬 디자이너의 업무도 무한했다. 현장을 알 수록 디자이너에게 많은 선택지를 줄 수 있으니까.
박규선 팀장이 공장 2층 회의실에서 우리에게 신발 제조 브리핑을 해주는 동안에도 공장 1층에서는 계속 신발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신발 만드는 과정과 어려움을 들었으니 신발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었다. 우리는 1층으로 내려갔다. 운동화가 태어나는 곳으로.
신발 제조 공장 역시 지난번에 본 봉제 공장과 개념적으로는 비슷했다. 각종 원자재가 단계별로 조립된다. 그 과정이 끝나면 제품이 완성된다. 완성된 제품은 검품 과정을 거쳐 출고된다. 운동화 생산 각 과정 사이에서 선반 작업이나 재봉 작업 등을 하므로 시끄러운 소리가 나기도 한다. 의류 공장과 비교했을 때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소재와 소재를 붙이는 방법이다. 의류 공장은 A 부분과 B 부분을 붙일 때 거의 실로 꿰맨다. 신발 공장은 각 부분을 꿰매는 동시에 본드로 붙이는 공정도 많다. 각 부분을 '붙인다'는 사실이 신발 제조의 난이도를 높인다. 공정이 추가될 때마다 그 공정에 맞는 기계와 전문가가 필요해진다.
1. 신발 대량 생산에 필수인 라스트. 신발 제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라스트를 끼운 채 진행한다. 출고 직전에 뺀다.
2. 신발들은 제조 공정이 더해질 때마다 벨트에 실려 앞으로 흘러간다.
"사실 저 분은 굉장히 어려운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신발 공장을 운영하는 천일상사 김태성 이사가 말했다. 그의 앞으로는 신발의 족형을 만드는 라스트에 신발 가죽을 끼우는 분이 가죽을 끼우고 있었다. "저 가죽을 라스트에 잘 끼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초심자가 끼우면 울거나 흔들립니다. 저걸 제대로 끼워야 본드를 붙일 때 흔들리거나 울지 않아요. ‘누군가를 봤을 때 그가 하고 있는 일이 쉬워 보인다면, 바로 그 사람이 달인이다’라는 말이 있죠. 저 분이 그런 분입니다." 신발 제조의 각 분야마다 장인의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앉아 있는 셈이었다.
1. 신발 생산은 본드를 바르는 '본딩'의 연속이다. 본드를 녹이거나 굳히기 위해 열을 가하기도 한다.
2. 천일상사에서 말한 핵심 공정 중 하나. 저 앞부분을 약간 갈아서 거칠게 만든 뒤 본드를 붙이면 본드가 더 잘 붙는다고 한다. 저 부분을 담당하는 숙련공은 한 분 뿐이다.
3. 신발 제조는 계속 라스트에 끼운 채 진행된다.
본드를 붙이는 '본딩'은 그렇기 때문에 신발 제조의 핵심 기술이다. "제조 공정에서 가장 많이 생기는 불량이 앞코가 떨어져 나가는 겁니다." 김태성의 설명이다. 나라도 운동화를 샀는데 앞코가 덜 붙으면 즐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본드를 많이 칠해 본드가 앞코 밖으로 삐져 나오면 그것도 불량이다. 너무 많이 칠하지 않기 위해 조금 덜 칠했다가 앞코가 떨어지면 그 역시 불량이다. 즉 적당한 양의 본드를 한 번에 칠해서 바로 붙여야 합격이다. '본드 붙이는 거 뭐 그리 어려운 거라고'라고 생각한다면 생산 현장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산 현장은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신발이 끝없이 강처럼 떠내려온다. 자동화를 하면 안 되냐고? 그러기엔 새로 만들어지는 운동화의 종류가 너무 많고 모든 운동화는 본드를 붙여야 하는 양과 본드가 붙는 면의 곡률이 조금씩 다르다. 이 역시 언젠가는 자동화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기계가 사람을 대체할 수 없다.
1. 천일상사에서 제작중인 운동화. 상부가 다 만들어졌지만 아직 밑창이 붙지 않은 게 보인다. 상부를 만든 뒤 하부 부품을 붙인다.
2. 곡면 제봉은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다. 신발 제조는 어디든 아직 기계 진입이 어렵다.
"아까 부장님께서 (신발 공장이)장치산업이라고 하셨죠." 나와 나란히 걸으며 생산 공정을 알려주던 김태성 이사가 말했다. "저는 이게 다 사람으로 보여요." 현장 사람다운 말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신발 제조는 대량 생산이라고 하기엔 너무 변수가 많았다. 모든 운동화는 조금씩 다를 텐데 같은 운동화 안에도 230부터 280까지의 사이즈 구분이 있다. 천일상사는 코오롱스포츠의 스니커즈를 비롯해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기 때문에 오늘 만드는 운동화와 내일 만드는 운동화가 다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수십 명의 근로자께서 매일매일 다른 신발의 갑피를 꿰매고 윗창과 아래창을 본드로 붙이인다. 사람이 할 수밖에 없는 일인데 불량률은 0.5% 미만이다. 10000족을 만든다면 50족 수준의 불량률이다. 내 입장에서는 입이 벌어질 정도로 높은 완성도지만 천일상사 입장에서는 별로 달가운 수치가 아닌 듯 보였다. "0.3%는 되어야 합니다." 그가 냉정하게 말했다.
1. 윗창과 아래창을 붙이는 본딩. 이 부분 역시 굉장히 중요하다. 본드가 적게 붙으면 떨어져 나가고 많이 붙으면 삐져 나온다.
2. 이 앞부분이 가장 불량이 많이 발생하는 부분이다. 앞부분이 모두 깨끗한 걸 볼 수 있다.
3. 품질은 양심이다. 묵직한 말이다.
여기서 부산 신발 산업의 숙명적인 슬픔이 피어난다. 부산의 요즘 별명은 '노인과 바다'일 정도로 노년층 비중이 높다. 즉 숙련 노동자들도 나이가 드셨다. 천일상사 공장에도 지긋한 분들이 많았다. 이제 나이가 든 숙련공들이 아직도 신발에 본드를 붙이고 신발 곳곳을 다듬고 있었다. 한국은 잘 사는 나라가 되었으니 인건비는 점점 상승하고 나이든 분의 생산성은 안타깝게도 조금씩 떨어지는데 젊은 사람들은 이런 생산직 노동을 잘 하려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생산기지가 대부분 베트남으로 이동하는 추세다. 뉴밸런스 등 일부 브랜드처럼 '메이드 인 USA'나 '메이드 인 UK'를 독자 브랜드화하는 사정도 이해가 갔다. 거기서는 비싼 신발만 나와야 할 테니.
전반적으로 근로자의 연배가 적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쯤 되면 '메이드 인 코리아'나 장인정신 등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개념을 돌아보게 된다. 한국에서 꿰매고 붙이는 '메이드 인 코리아' 신발도 각 부품은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생산한다. '메이드 인 코리아'라기보다는 '어셈블드 인 코리아'에 가까워진다. 그런 중에도 천일상사의 근로자들은 이제 자신들의 일부가 된 신들린 솜씨로 신발을 만든다. 갑피를 꿰매고 본드를 붙이고, 다 만들어진 신발 안에는 종이를 구겨 넣고 포장지로 싸서 신발 상자 안에 넣고 뚜껑을 닫는다. 현장에서 본 바 이 모두는 장인의 솜씨였다. 이른바 장인은 개개인의 노력 끝에 되는 것이기도 하겠으나 누군가의 마케팅으로 만들어지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이들은 아직 무명 장인이다. 기술은 있으나 누구에게도 '장인'이라는 호칭을 받지 못했다. 당신의 노력이 그렇듯이.
1. 밑창까지 붙고 나면 이제 출고가 멀지 않았다.
2. 라스트를 뺀 신발이 최종 출고 과정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3. 빠져나온 라스트가 빠져나와 보관된 모습. 다른 곳에 또 써야 한다.
4. 라스트 대신 종이를 끼운 채 출고를 기다리고 있는 천일상사 제조 신발들.
도시의 우리가 신발의 브랜딩을 생각하고 신발을 구입하는 동안 이곳 부산에서는 여전히 매일매일 신발을 만든다. 그 사실을 보여주는 게 천일상사의 품질경영방침이다. 천일상사 2층 회의실 벽에는 'TQM의 활성화'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TQM? 처음 보는 약자라 김태성 이사에게 뜻을 여쭤보았다. "아 그게 저희끼리 쓰는 말인데요, '토탈 퀄리티 매니지먼트'입니다." 나는 깊이 감동했다. 종합적 품질 관리라니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가. 내 일을 비롯해 우리 모두 각자의 일에서 TQM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산에서 열심히 신발을 꿰매고 본드를 붙이는 분께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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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관찰하고 사람을 경청해 맥락을 사진에 담는 사진가입니다. 광고, 매체 등 상업 작업과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을 동시에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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