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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대는 훗날 친환경 럭셔리 개념의 혼란기로 기억될 듯하군, 2년 전인 2021년 여름 고속도로 위에서 운전대를 잡은 채 생각했다. 일 때문에 어느 세계적인 고급차 브랜드의 신형 100% 전기차를 타던 중이었다. 이 차 안에도 '오늘날의 친환경 고급차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황홀한 성능과 그 브랜드 특유의 핸들링은 여전했다. 그러나 지금은 고급스러움을 위해 동물의 가죽을 샅샅이 두를 수 없는 시대다. 이 브랜드는 그래서 시트에 비건 가죽을 둘렀다.
친환경과 지속가능성의 중요성에 동의하기 때문에 더 무안하고 미안한 말이지만 그 비건 레더 시트는 별로 달갑지 않았다. 비건 가죽의 촉감이 가죽을 따라잡을 수 없는 걸까? 아니면 내가 가죽을 고급 소재라 느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2억원은 족히 나갈 그 차의 비건 가죽 시트가 내게는 영 어색해 보였다. 내가 2억원을 일시불로 전기차에 쓸 친환경 부자라도 시트에서 멈칫할 것 같았다. 그때 그 기분을 떠올리며 오늘의 주인공인 비건 레더들을 찾아보았다. 지속가능성을 위한, 가죽을 대체하는 가죽 모양과 질감의 소재들을.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비건 가죽'에 대해 간단히 짚어 본다. 가죽은 필연적으로 동물을 죽이고 가공 과정에서 유해 화학물질을 쓴다. 그 대안인 '인공 가죽(artificial leather)'은 동물의 피혁을 쓰지 않고 가죽 질감을 낸다. 우리가 '레자'라 부르는 가죽 모양의 비닐 코팅계 소재도 인공 가죽에 포함된다. 아울러 요즘 각광 받는 '비건 가죽'은 '가죽, 모피, 실크 등 동물성 소재를 사용하지 않은 가죽 모양 소재'다. 즉 '레자'도 비건 가죽이 될 수 있다. 다만 오늘 소개할 소재들은 '레자' 계열에서 조금 더 나아간, 식물성 가죽(모양)소재다. 이 소재들을 하나씩 들여다보고 굽혀보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1.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만드는 망고 가죽 '내추럴'의 표면.
2. 망고 가죽 '내추럴'의 표면을 클로즈업해서 촬영한 모습. 굳이 '비건 가죽'이라 부르지 않아도 충분한 자신만의 매력이 있다.
망고 레더는 거친 질감이 눈에 띄었다. 가죽이나 금속 등 소재가 오래된 표면을 파티나(patina, 원래는 오래된 동에 끼는 녹청을 말한다)라고 하는데, 가죽의 파티나가 꽤 진행된 듯한 모습이었다. 이 파티나는 말하자면 '망고 파티나'다. 망고 레더는 네덜란드의 '프룻레더 로테르담' 에서 만든다. 유럽에서 판매되거나 유통되는 망고의 50% 이상이 네덜란드를 거치고, 그중 폐기되는 일정량의 망고로 가죽을 만든다. 사진 속 샘플 이름은 '내추럴'. 보면 왜 이런 이름인지 알 것 같다. 질감 역시 햇볕 아래 오래 둬서 딱딱하게 둔 가죽 느낌이었다(원래 샘플은 부드럽고, 내추럴 말고 다른 샘플들은 일반 가죽과 흡사하다).
1. 뒤집어 보면 망고 가죽의 구조를 알 수 있다. 천 위에 망고 펄프를 굳히는 개념이다.
2. 일반 가죽의 패턴을 적용시킨 만오 가죽의 표면과 입면. 보통 가죽과 큰 차이 없어 보이는 색과 패턴 아래로 망고 펄프의 흔적이 보인다. 이렇게 되면 긁혔을 때 가죽 특유의 멋이 나는 대신 망고 펄프의 색이 도드라질 것이다.
3. 코펜하겐에서 만드는 사과 가죽의 표면. 역시 가죽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맨 아래에 보이는 흰색 천은 사과 가죽을 뒤집은 것. 역시 탠셀 섬유 위에 사과 펄프를 얹었다. 식물성 대체 가죽의 제작법과 구조는 거의 비슷하다.
4. 사과 가죽의 샘플 박스. 보통 소재 샘플과는 달리 상당한 수준의 디자인과 브랜딩이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이 디자인과 브랜딩 비용 역시 제품 가격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친환경 소재가 비싼 데에는 여러 층위의 이유가 있다.
망고 레더를 비롯해 식물성 대체 가죽을 만드는 방법은 비슷하다. 원료가 되는 식물을 갈아 반죽같은 펄프로 만든다. 펄프를 잡아주는 섬유 위에 펄프를 깔고 굽고, 그 위를 코팅한다. 망고 가죽에서 뒤이어 본 사과 가죽도 마찬가지다. 이 사과 가죽의 고향은 덴마크 코펜하겐이다. 코펜하겐의 비욘드 레더는 지역의 사과주스 및 애플 사이더 공장과 협의해 거기서 받아온 사과 찌꺼기로 가죽을 만든다. 이 아이디어 역시 널리 퍼져서 이탈리아의 메이블에서도 사과를 활용한 사과 가죽을 만들고 있다. 사과 가죽에서는 냄새가 정말 인상적이었다. 냄새가 어떠려나 싶어 코를 대 보니 정말 사과 냄새가 났다. 참고로 망고 가죽의 망고 냄새는 훨씬 희미했다.
1-2. 재활용 가죽의 표면과 후면. 재활용 가죽인 만큼 표면 뿐 아니라 뒷면 역시 스웨이드 질감의 가죽 뒷면 그대로다.
비건 레더인지 아닌지 분류가 모호할 듯한 대체 가죽도 있다. 재활용 가죽이다. 재활용 가죽은 이미 있는 가죽을 재활용해서 만든 제 3의 가죽이다. 가죽을 쓴 건 맞지만 이 가죽을 쓰기 위해 별도의 도축을 거치지는 않았으니 동물 보호 요건은 충족하는 셈이다. 재활용 가죽은 실제 가죽이 상당 부분 포함된 소재 답게 이날 접한 대체 가죽 소재 중 촉감이나 접히는 느낌이 내가 알던 일반 가죽과 거의 비슷했다. 그러나 이 콘텐츠는 셋의 우열을 매긴다거나 장단점을 분석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각 소재에 이 정도 특징이 있고, 대체 가죽 소재가 이렇게 많아졌다는 것 정도를 알아주신다면 충분하다.
비건 가죽 소재의 장단점은 명확하다. 장점은 의미다. 시장과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의미 있는 제품이 눈길을 끈다. 비건 가죽이 각광받은 이유부터가 기존 가죽 소재의 의미가 영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혁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의류 소재이자 문명의 일부이지만 동시에 오늘날 기준에서 더럽고 잔인한 면이 있다. 명분은 개인의 선택과 사회의 흐름에 분명 눈에 띄는 영향을 주고, 그 면에서 의미적으로 떳떳한 비건 가죽의 미래는 긍정적이다. 단점도 명확하다. 가격이다. 비건 가죽은 여전히 일반 가죽보다 훨씬 비싸다. 지구 환경과 지속가능성을 생각하는 소비를 하려면 돈이 많아야 한다. 비건 가죽이 의미의 세계에서는 월등하겠으나 숫자의 세계 속 지속가능성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비건 가죽의 성공을 가늠 하려면 대체 소재나 친환경 브랜드의 선례가 도움이 된다. 대표적인 선례는 플라스틱이다. 플라스틱이 웬 친환경 소재냐 싶겠지만 인류 최초의 천연수지 플라스틱인 셀룰로이드는 19세기 당시 당구공 재료이던 상아의 대체 인공 소재다. 셀룰로이드의 색과 질감이 뿔과 비슷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플라스틱으로 만든 안경을 '뿔'테 안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친환경 기조는 자원을 재활용하는 '업사이클'과도 이어지니, 세계적인 업사이클 패션 브랜드 프라이탁도 친환경 브랜드의 선례다.
실패 사례도 있다. 대표 사례가 올버즈다. 올버즈는 울과 사탕수수 등 친환경 소재로 스니커즈를 만들어 나스닥 상장까지 했으나 거기까지였다. 친환경 소재에 집중해서였는지 올버즈는 품질에 문제가 있었고, 올버즈의 추락은 성장만큼 빨랐다. 올버즈 주가는 상장 이후 기점으로 94.08% 하락(2023년 12월 31일 기준)했다. 친환경 제품은 의미 소비의 대상이고, 의미 소비의 타겟은 고객의 선의다. 엄정한 친환경 브랜드 포지션은 아니지만 고객의 선의를 타고 성장했다가 신의를 잃고 추락한 사례로 탐스 슈즈도 있다. 고객의 실질적 필요나 원초적 욕망이 아니라 선의에 기대는 비즈니스는 언제나 위험하다.
1. 비건 가죽 2종과 실제 가죽을 겹쳐놓고 비교한 모습. 표면만 봐서는 무엇이 가죽이고 무엇이 가죽이 아닌지 판단하기 어렵다.
2-3. 측면과 후면을 보면 판별이 쉽다. (좌)가죽은 뒷면의 스웨이드 부분이 드러나 있는 반면 (중, 우)비건 가죽은 천 위에 펄프를 얹은 개념이므로 표피와 내피, 하부의 소재가 모두 다르다.
의미의 세계에서는 의미와 명분만 통하면 성공이다. 이번 촬영의 재료가 된 다양한 비건 가죽 소재를 제공한 소재 라이브러리 콩크 백수경 대표는 소재 탐색을 위해 떠난 코펜하겐에서 ‘친환경 가죽’도 접했다고 했다. 가죽 제조 과정이 친환경적이라는 것이다. 학대 없이 천수를 누린 소 가죽만을 원료로 쓰고, 가죽 제조공정에서 유해물질을 통제하고, 그 모든 과정을 (소의 귀에 센서를 달아)추적했으니 과정이 윤리적이라는 논리였다. 대체 가죽에 식물 가죽에 윤리 가죽까지, 오늘날 가죽 시장에서 고를 수 있는 가죽이 늘어나고 있는 것 만은 확실하다. 조금 헷갈리긴 하지만.
하나는 재활용 가죽, 하나는 사과 가죽이다. 무엇이 무엇일까? 여기까지 보신 분이라면 맞출 수 있다.
헷갈리니까, 이런 가죽들을 ‘최신 재활용 소재’라고 깔끔하게 정리하면 어떨까? 굳이 모호한 비건 가죽이나 친환경 가죽 같은 말을 붙이지 않아도 오늘날의 미감으로 해석한 재활용 소재는 멋지다. 망고 레더의 내추럴 패턴에는 천연 가죽이 따라갈 수 없는 색채와 질감이 있다. 그 멋을 올해 새로 나온 어느 브랜드의 소형 고급 전기차에서도 확인했다. 그 차의 내장재 역시 친환경 소재였으나 2년 전 내가 탔던 고급 전기차와는 소재를 사용한 문법이 달랐다. 이들은 재활용 소재를 재료로 아예 신소재를 만들었다. 폐 데님을 활용해 플라스틱을 만들거나 재활용 울을 재료로 새 원단을 짰다. 여기서의 재활용 소재는 자신들의 바탕을 숨기지 않아서 더 멋졌다. 재활용 소재 특유의 불규칙 패턴은 나뭇결처럼 고유의 미적 요소가 되어 있었다. '가죽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최신 재활용 소재'를 만들어 그 소재만의 물성을 드러낸 셈이었다.
오늘의 소재들을 본 감상도 그랬다. 이들을 ‘비건 레더’라고 부르는 대신 식물 소재라는 ‘진짜 껍질’이라 칭하면 어떨까. 왜 굳이 ‘비건 레더’라는 ‘가짜’ 레더가 되어야 할까. 나일론을 럭셔리의 세계로 끌어올린 프라다처럼, 트럭 텐트를 에코 럭셔리로 탈바꿈시킨 프라이탁처럼, 가짜와 진짜의 차이는 결국 의미 부여의 세련미와 고객의 호응에 달려 있다. '의미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친환경 소재가 전하는 이 시대의 화두다.
정보를 찾고 정리해 페이지를 만듭니다. 2023년에는 잡지사 에디터로 일하며 각종 매체에 원고를 기고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이채로운 포트폴리오를 가진 사진가 중 하나입니다. 유명 K팝스타부터 길가의 고양이와 한강의 표면까지, 그의 눈과 렌즈를 거쳐 조금 다른 사진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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