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KOLONMALL. ALL RIGHT RESERVED
“제가 그냥 뒤집어 입었어요.” 래코드 디자이너 박선주 실장은 무늬가 멋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티셔츠 무늬를 이야기했더니 그의 말이 이어졌다. “이렇게 뒤집었을 때 나오는 이런 실루엣이 일반 티셔츠랑 좀 다르거든요. 목이 좀 올라와 있고 어깨 패턴도 달라 어깨가 넓어 보여요. 래코드 옷을 만들 때도 일반적인 옷을 가지고 와서 래코드스럽게 또 새롭게 뭔가 아이디어를 내야 되잖아요. 그럴 때 제일 먼저 해 보는 게 ‘인사이드 아웃’시키는 이런 과정이에요. 뒤집어보고, 앞뒤로 바꿔보고, 위아래를 바꾸고, 안을 뒤집고…”
래코드는 이렇게 옷에 대한 개념을 뒤집으며 만드는 브랜드다. 래코드는 옷감에 대한 개념부터 옷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까지를 뒤집으며 시장에 묻는다. 좋은 옷은 무엇인가. 얼마여야 하는가. 이 옷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그 의문의 출발점 역시 보통 브랜드와 다르다. 래코드의 재료는 보통의 옷감이 아닌 소멸 직전의 재고 의류이기 때문이다.
옷도 생애 주기가 있다. 시즌과 트렌드를 예측해 디자인된 신상품은 백화점이나 로드숍 등의 매장에 화려하게 전시된다. 그 옷들이 판매되지 않으면 옷들은 나이든 운동선수처럼 조금씩 무대를 옮긴다. 할인 매장으로, 할인 매장의 할인 매장으로. 보통 여기서도 선택을 받지 못한 옷들은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진다. 그런 옷들이 래코드의 재료가 된다. 폐기 물품이 재료가 된다니, 래코드는 옷감에 대한 개념부터 뒤집으며 시작하는 셈이다.
경기도 안양의 코오롱세이브프라자에 래코드의 옷감이 될 옷들이 쌓인 창고가 있다. 코오롱세이브프라자는 태어난 지 3년이 넘은 재고들이 모여 있는 2차 할인매장이다. 할인 매장이라 해도 매장도 널찍하고 주차도 편해서 일반 매장과 다름없이 편안한 쇼핑이 가능하다. 다만 옷의 생애주기 관점에서 생각했을 때 이곳이 마냥 마음 편한 곳은 아니다. 고객과 옷이 만날 수 있는 마지막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 매장 건물 위 어딘가가 래코드의 발원지다.
1. 코오롱 세이브프라자 안에 있는 가치에 대한 문구.
2. 코오롱 세이브프라자에서도 쾌적한 쇼핑을 즐길 수 있다. 다양한 의류가 준비되어 있다.
그 창고에 래코드 옷의 재료가 될 옷들이 옷걸이와 상자에 가득 걸려 있고 들어 있다. 고객을 만나지 못할 뻔 하다가 디자이너의 선택으로 다시 고객을 만날 기회를 얻은 옷들이다. 코오롱이 자랑하는 코오롱스포츠의 패딩점퍼나 캠브리지멤버스의 재킷이 보이고, 다양한 소재 재활용을 고민하는 걸 암시하듯 테이블 한 켠에는 자동차 에어백이 놓여 있기도 했다.
1. 매장 위에 자리한 래코드 창고의 모습. 디자이너들이 실제로 옷을 보러 오기도 한다.
2. 래코드 창고의 모습. 새로운 옷이 되기 위해 선별된 옷들이 구획으로 나뉘어 분류된 게 눈에 띈다.
프라이탁이 트럭의 방수천으로 가방을 만들듯 래코드는 코오롱의 재고 의류로 새 옷을 만든다. 이 옷의 모습이 실제 래코드로 다시 태어날 옷의 모습에도 영향을 미친다. 어떻게 왜 영향을 미치는지 알기 위해서는 무대를 옮겨야 한다. 삼성동으로. 래코드의 장인과 디자이너들이 있는 곳이다. 박선주 실장이 티셔츠를 뒤집어 입고 래코드 디자인을 지휘하고 있다.
“원단의 퀄리티나 디테일들이 버려지는 게 너무 아까우니까…” 박선주 실장은 옷에 대해 감성적으로 표현하곤 했다. “지퍼나 단추나 후드처럼 디테일들이 굉장히 좋은 걸 찾아낸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아요. 내 눈으로 내 감각으로 얘를 잘 바꿀 수 있겠다.” 같은 말을 할 때 그는 정말 진지해 보였다. 이 진지함으로 지금까지 브랜드를 유지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삼성역 근처 사무실 건물 사이에 래코드의 사무실 겸 아뜰리에가 있다. 3차 산업에 속하는 사무직들이 가득 일하고 있는 사무실 사이에 실제 재봉틀을 두고 일을 한다. 박선주 실장같은 디자이너가 찾아낸 디테일을 현실화시키는 일이다. 햇빛이 잘 드는 창가, 가로 3m, 세로 1.5m쯤 되어 보이는 작업대 끝에 재봉틀이 놓인 작업 부스가 3개 있다. 재봉틀 앞에 계신 장인들은 말 한 마디 없이 집중하고 있는 숙련자 특유의 모습으로 그날 분량의 봉제를 한다. 그 중 가운데 작업대에서 옷 해체 과정을 지켜보았다.
새로운 옷을 만들기 위해 새 옷의 소재가 될 재고를 다리고 디자이너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래코드 디자인 팀은 서면 인터뷰에서 "재고의 형태와 특징이 탄생하는 컬렉션을 좌우" 한다고 했다. "재고를 재료로 하기에, 시즌 기획 시기에 발견되는 3년차 재고의 디자인과 퀄리티로 컬렉션의 분위기가 다소 달라지는 부분"이 생길 정도니까. 재고 의류의 패턴과 모습이 옷의 형태와 직결되는 셈이니 깨끗하고 말끔하게 옷을 해체하는 일은 래코드에서 자연히 의미가 크다.
1-2. 옷을 해체하는 과정. 기계나 지름길같은 게 없이 하나 하나 손으로 해체시킨다. 도구는 면도날과 실밥 빼는 도구 두 개뿐이다.
3. 재킷의 한 판을 발라낸 모습.
옆에서 지켜보니 옷을 해체하는 건 그 자체로도 상당한 공이 드는 일이었다. 실제 패턴을 옷에 활용해야 하니 조심해서 옷의 디테일을 살리며 떼어낼 수밖에 없었다. 장인은 립밤보다 조금 작은 면도기를 손에 들고 옷감을 꿰맨 실을 끊어 나갔다. 면도날이 하루를 못 버텨서 하루에도 몇 개씩을 쓴다고 했다. 물건도 재료도 다루기 나름이다. 그의 손 안에서 다시 만들어진 옷의 조각들이 귀한 재료로 보이기 시작했다. 접힌 부분은 다리미로 즉시 다려졌고, 그런 식으로 모든 재료들이 귀하게 다뤄지고 있었다. 이 과정을 영상으로 만들어 매장에 틀어 두면 모두가 래코드의 가격과 가치를 이해할 듯한 광경이 이어졌다.
1-3. 디자이너와 패터너가 만든 패턴을 대 보며 실제 재단을 가늠하고 옷감을 옷 모양으로 잘라낸다. 패턴지 위로 디자이너 이름 '혜진'이 보인다.
4. 업사이클 디자인이 적용된 원피스 앞판을 만들기 위한 퍼즐 문제풀이같은 과정이 계속된다. 적합한 크기와 모양으로 천을 자르고 봉제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장인의 손과 디자이너의 눈이 멋진 브랜드를 만든다. 래코드의 옷처럼. 이날 만들 옷은 정장 재킷을 해체한 뒤 각 부분을 여성 원피스의 디자인 요소로 만든 것이다. 재킷의 각 부분을 잘라낸 뒤 그걸 퀼트하듯 이어 붙여 한 장의 새 옷감으로 만든다. 재고였던 옷을 새 옷의 원단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과정이라 래코드는 이 공정에 ‘퍼즐링’이는 이름을 붙였다. 디자이너는 옷을 뒤집어보며 살릴 디테일을 찾아내고, 그 디테일은 장인의 손으로 구현되며, 그건 자연히 품을 많이 들여 아름다운 걸 만들어내는 일이다. 래코드를 럭셔리 브랜드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이유다.
래코드 공방에서 업무를 하는 장인의 모습
이를 위해 봉제 장인들도 노력한다. 래코드는 특성상 다양한 소재를 꿰매야 할 일이 많다. 다양한 소재를 한 번에 놓고 꿰매기 위해서는 재봉틀의 바늘 끝에 끼우는 노루발이 종류별로 다양하게 있어야 한다. 래코드의 봉제 장인들은 수십 종에 이르는 노루발을 가지고 있다. 이 중 봉제 경력만 45년 이상으로 가장 경력이 길다는 노승선 선생님은 래코드가 워낙 특수한 브랜드라 디자이너의 디자인을 봉제로 현실화하는 일도 “길을 찾는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기는 분위기가 좋아서 좋아요. 내가 원래 리폼 같은 걸 좋아하기도 하고.” 라며 수줍게 웃었다.
그 과정이 완료된 원피스의 모습. 원형이 조금씩 남아있는 게 디자인 포인트다.
래코드의 정체성은 업사이클링이다. 이들이 옷을 통해 보여주는 것, 옷을 만드는 현장에서 내가 본 것, 래코드와의 별도 인터뷰에서 보여준 자신들의 정신은 모두 일치했다. 오늘날의 럭셔리는 노승선 선생 같은 숙련공의 노력과 그 노력의 사상적 의미 부여다. 그 작업이 진행되려면 사람의 손길과 노력이 더 들어가야 하며, 그는 결국 가격 인상을 뜻한다. 앤틱 가구처럼 업사이클이라는 유지보수에도 사람의 손이 들어간다. 비쌀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1-2. 래코드의 초기작 모음. 검은 옷은 의류 원단 끝에 있는 부분들을 모아 새로운 천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흰 원피스는 타이 심지를 모아서 만들었다. 타이 심지가 옷 한 벌을 위한 천 분량으로 만들어지려면 옷감을 만들기 위한 바느질 공수부터 상당하니 이 옷의 가격은 생각 이상으로 비쌌다.
3. 래코드 옷의 패턴을 모아둔 아카이브. 래코드 10년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래코드의 결실은 이 외에도 많다. 일단 인재가 모인다. 이날 만난 디자이너 중 한 명은 영국에서 패션을 공부한 뒤 서스테이너블 패션에 관심을 갖다가 래코드에 합류했다고 했다. BTS는 UN 연설을 할 때 래코드의 옷을 입었다. 2023년 세계적인 디자인 박람회인 밀란 디자인 위크에서도 ‘리콜랙티브 밀란(RE;COLLECTIVE MILAN)’ 전시를 선보였다. 이 기간 동안 ‘푸오리살로네 어워드’에서 지속가능 부분 수상을 하기도 했다. 세계가 래코드를 환영하고 있다. 지난 12년간 해온 노력이 조금씩 결실이 되어 돌아오는 셈이다.
래코드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의류 택. 딱 하나만 만들어진 컬렉션 피스.
이 외에도 래코드는 비즈니스의 여러 멋진 일들을 하고 있다. 새터민, 자립 청년, 싱글맘, 난민 등의 사람들에게 직업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 사실 래코드 아틀리에에서 뵈었던 분 중 한 분도 새터민이었고, 그분 역시 편안하게 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날의 브랜드는 생산과 아이디어의 디테일 역시 결과물의 가치로 이어지고, 이는 래코드를 응원할 이유이자 이들을 지지할 논리이기도 하다. 디자이너의 소신과 숙련공의 손, 그리고 이들이 앉은 햇빛 비추는 창가를 생각하면 역시 이들을 조금 더 응원하게 된다.
정보를 찾고 정리해 페이지를 만듭니다. 잡지사 에디터로 일하며 각종 매체에 원고를 기고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이채로운 포트폴리오를 가진 사진가 중 한명입니다. 유명 K팝스타부터 길가의 고양이와 한강의 표면까지, 그의 눈과 렌즈를 거쳐 조금 다른 사진을 만듭니다.
첫번째 댓글을 달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