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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육수에 메밀 면을 담고 고명을 얹으면 냉면이다. 이게 전부라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차가운 육수에 메밀 면을 담고 고명을 얹으면’이라는 모든 표현에 디테일이 있다. 재료의 품질, 생산과 조리 도구, 육수를 내거나 면을 끓이고 빼는 타이밍에 따라 맛의 세부가 정해지며 완성도가 결정된다. 기본기뿐 아니라 만드는 사람의 간을 맞추는 감각 등 여러 개인적인 세계관과 기호도 변수가 된다. 원료와 설비와 제작자의 세계관, 먹는 이의 취향까지 이 모든 변수가 합쳐져 냉면이라는 세계가 완성된다.
양말이 가지런히 쌓인 풍경은 미묘하나 확실한 안정감을 준다.
의생활의 여러 세부 요소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양말이 그렇다. 겉으로 보면 다 비슷한 양말이라도 사실은 생각 이상으로 다르다. 예를 들어 양말을 짜는 실을 납품 받을 때 실패에 감아 둔 채로 실을 받아 양말을 짜는 회사가 대부분이다. 반면 일본의 어느 고급 양말 제조사는 실을 실패에 감아두지 않고 보관하다가 양말을 짜기 직전에야 실패에 감는다. 미리 실패에 감아둔 실은 미세하게나마 탄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디테일이 냉면에 적용되면 고급 냉면이고 양말에 적용되면 고급 양말이다.
맛에는 명답만 있을 뿐 정답은 없다. 명답으로 가는 길도 다양하다. 재료 품질은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쓰는 도구에 따라 같은 재료라도 다른 맛이 날 수 있다. 재료와 도구를 넘어 만드는 사람의 판단과 기호도 변수다. 재료와 도구와 인간이라는 3요소가 양말을 만든다. 이 모두가 다양한 변수이니 결과물 역시 크게 달라진다.
양말의 변수를 정리해보기 위해 임의로 개념을 만들어보았다. 개념의 이름은 품질 지표와 기호 지표다. 품질 지표는 누가 봐도 '이건 품질과 연관이 있군' 싶은 요소들이다. 원사의 품질, 제조 난이도, 상품 검수 등 모든 제조 과정을 끝내고 소비자가 신어 봤을 때 거슬림이 없는 요소들을 말한다.
양말의 다양한 벤딩. 끝을 어떻게 마무리했냐에 따라 조이는 정도가 다르다.
기호 지표는 품질과 연관이 크게 없을지 몰라도 내 감상에는 영향을 주는 요소들이다. 예를 들어 양말을 신을 때 스타킹처럼 꽉 껴도 좋으니 흘러내리지 않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나 문화권이 있을 수 있다. 혹은 개인적인 기호에 따라 양말이 조금 흘러내려서 구불구불해도 좋을 수 있고, 아니면 양말이 고무줄처럼 종아리를 옥죄는 느낌이 싫을 수도 있다.
품질과 기호가 미묘하게 맞물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유럽의 고급 정장용 양말에는 실크가 들어가고 탄성은 상대적으로 낮다. 유럽 사람들은 괜찮지만 한국 사람들은 이 양말을 신을 때 조금 더 미끈거리고 잘 흘러내린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국가와 장르별로 제품에 대한 기호가 생기고, 그 기호의 총합이 시장의 성향이라 할 수 있다. 각 제품 제조사는 그에 맞춰 물건의 성향을 설정하게 되니 시장은 역시 복잡하다. 양말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양말의 짜임을 볼 수 있는 확대 사진. 이 양말은 자원 낭비에 집중해 의도적으로 남은 실들을 이용해 양말을 만들었다. 그 결과 이렇게 무작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패턴이 나왔다.
양말의 가장 기초적인 품질요소는 실 자체다. 냉면의 메밀 함량에 따라 가격과 질감이 달라지듯, 양말에도 어떤 섬유의 함량이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품질과 가격이 달라진다. 양말을 비롯해 피부에 직접 닿는 언더웨어류 의류들은 보통 면을 많이 쓴다. 면 함량과 제품의 품질이 일정부분 비례할 수 있다는 의미다. 화학섬유는 약간 애매하다. 지금의 화학섬유는 기능성 고가와 가성비형 저가로 양분된다. 화학섬유 함량이 높으면 고급스럽지 않다는 정리는 섣부르다.
화학섬유가 용인되는 장르는 따로 있다. 냉면도 메밀 100%라고 좋은 게 아니듯 양말도 면 100%일 수 없다. 속건성 등 퍼포먼스가 중요한 스포츠 양말에서는 기능적인 이유로 화학섬유를 쓰기도 한다. 다만 우리가 일상에 신는 양말에 화학섬유가 많이 들어간다면 왜인지 설명은 못해도 봤을 때 약간 경박스러운 느낌으로 광택이 돌 것이다. 저가형 남성 정장 양말에서 볼 수 있는 그 광택감이다. 말하자면 냉면 느낌 비빔면 같은.
원료로 만든 원사의 디테일도 모두 양말 품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굵은 실로 만들지, 얇은 실로 만들지, 그 실의 원료는 무엇인지에 따라 다양한 냉면집의 냉면 맛만큼 다양한 양말 신는 맛(착용감)이 만들어진다. 메밀을 갈아 면으로 만들 때 메밀을 곱게 갈았는지, 거칠게 갈았는지에 따라 식감이 달라지는 것과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다.
보통 사람이 캐주얼 양말을 고를 때 볼 수 있는 기준 중 하나는 원사의 중량이다. 같은 양말이라도 조금 더 두툼한 원사(실)를 쓰면 그만큼 양말이 푹신해지고 내구성도 높아진다. 그런 이유로 캐주얼 브랜드 '새러데이 레저 클럽'을 운영하는 엄효열 대표는 양말을 생산할 때 두툼한 원사를 써서 중량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중량을 높이기 위해 두꺼운 양말을 만든 게 아니라 편안하고 튼튼한 양말을 만들다 보니 중량이 높아진 것이다. 오프라인 매장에서 양말을 고른다면 중량이나 두께는 쉽게 확인할 수 있으니 참고하기도 쉽다.
1. 1950년대의 제직기로 짠 양말의 표면 클로즈업. 육안으로 봤을 때 약간 투박하고 실제로 신으면 거슬릴 부분 없이 무척 편안하다.
2. 정밀한 짜임새가 돋보이는 양말의 표면. 정밀한 짜임은 더 쾌적한 착용감으로 이어진다.
양말의 품질을 이루는 두 번째 요소는 양말을 짜는 방식이다. 양말은 구조적으로 신축성이 있으니 직물(woven)이 아니라 편물(knit)에 속한다. 이를 어떻게 짜고 마무리를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서도 양말의 품질이 달라질 수 있다. 이 단계로 넘어가면 양말을 만드는 기계가 변수가 된다. 이를테면 가스불로 우린 육수와 인덕션 레인지로 우린 육수에는 미묘한 맛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커피 역시 커피 머신에도 연식과 브랜드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있고, 해당 머신이 구현할 수 있는 커피의 맛에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자세한 설명을 해준 사람은 2011년 양말 편집매장을 창업해 지금까지 건재한 삭스타즈 성태민 대표다. 그는 기계의 관리 상태 역시 양말 결과물의 품질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발가락 양말을 만드는 기계는 따로 있다고 하니 대량생산의 세계는 역시 심오하다.
발가락 양말의 세부. 발가락 양말 편직기는 일본의 시마 세이키가 특허까지 받았다.
양말을 짜는 방식에도 품질을 넘어선 기호가 작동할 수 있다. 요즘 남자 옷 중에는 일부러 옛날 방직기로 작업해 (말하자면)네오 레트로 느낌의 원단을 만드는 곳이 있다. 그런 원단으로 옷을 만들면 오히려 튼튼한 옛날 옷 느낌이 나서 거기에도 나름의 낭만이 있다. 일부 데님 브랜드나 스웨트셔츠 브랜드는 옛날 방직기로 생산한다는 걸 마케팅 포인트로 삼기도 한다. 양말도 마찬가지라 옛날 방직기로 양말을 짜면 결과물이 다르다. 요즘 양말처럼 매끈한 느낌 대신 조금 더 거친데도 고급스러운 느낌이 난다.
그런 요소들이 붙으며 양말의 가격이 변한다. 성태민 대표의 삭스타즈에는 5천원짜리 양말과 4만원짜리 양말이 함께 있다. 전자는 가격대비 성능에 주력해 한국에서 생산한 양말, 후자는 옛날 기기를 활용해 예전 방식으로 만들고 검품도 확실히 하는 일본이나 유럽산 양말이다. 이 양말들을 두고 비싼 게 좋고 싼 게 나쁘다거나, 반대로 비싼 게 바가지고 싼 게 좋다거나 정도로 생각하는 건 너무 단편적인 해석이다. 생산자와 시장 각자의 상황과 세계관에 맞춰 각자의 결과물이 나왔을 뿐이다.
1-3. 양말에 들어간 무늬를 확대해 촬영했다. 이쯤 되면 공예 뿐 아니라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에 대한 크리에이티브도 의미를 띤다.
4. 양말의 앞코 마무리 방식도 조금씩 달라진다. 한 번 꿰매냐 두 번 꿰매냐, 이런 요소에 따라 단가와 착용감이 변하게 된다.
양말에 들어간 무늬를 생각하면 양말의 주관적 성향에 대해 더 이해하기 쉽다. 어떤 양말은 한 색으로 짜인 방면 어떤 양말은 빈 캔버스에 그린 그림처럼 다양한 그림이 짜여 있다. 이 무늬에도 급이 있어서 양말의 가격이 비싸질수록 무늬의 해상도가 높아진다. 이 해상도는 가격과도 연결된다. 양말의 제조원가 중에는 양말 한 켤레를 짜는 시간이 필요할 텐데, 무늬가 복잡해지면 아무래도 양말 한 켤레를 짜는 시간이 더 걸리기 때문이다. 양말의 무늬는 개인적인 기호지만 그 무늬를 생산하는 관점에선 절대 품질이 있는 셈이다.
소비자 입장에서 양말을 고를 때는 어디를 보면 좋을까. 성태민 대표는 양말 앞 코를 말했다. 실제로 양말의 가격이 조금 더 높아지면 코 부분의 마무리가 조금 더 정밀해진다. 양말 앞 코는 벙어리장갑같은 것이니 이쪽이 잘 만들어져야 신었을 때 편하다. 아울러 양말의 품질은 세탁을 해봐야 알 수 있다고도 했다. 양말 맨 위의 벤딩(종아리를 적당한 힘으로 조이며 양말이 흘러내려가지 않는 역할을 한다)의 탄성을 유지하는지 등의 여부는 세탁을 해봐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궁금해질 수 있다. 이 모든 걸 다 생각하고 양말을 사야 하는지.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게 많은데 양말까지 이렇게 알아보고 사야 하는지. 물론 안 그래도 된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을 알고 그 사이에서 나에게 맞는 것을 나의 의지로 고르는 게 취향 아닐까. 양말에 취향을 담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 원고가 도움이 되길 바란다.
정보를 찾고 정리해 페이지를 만듭니다. 잡지사 에디터로 일하며 각종 매체에 원고를 기고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이채로운 포트폴리오를 가진 사진가 중 한명입니다. 유명 K팝스타부터 길가의 고양이와 한강의 표면까지, 그의 눈과 렌즈를 거쳐 조금 다른 사진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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