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KOLONMALL. ALL RIGHT RESERVED
밤으로부터 위로가 되어주는 브랜드, ‘훈밤’의 대표 박훈정 작가를 만났다.
공릉역의 고즈넉한 주택가 사이에 있는 작업실은 통창으로 스며든 따뜻한 햇살과 손수 빚어낸 잔과 그릇, 아기자기한 작품들로 가득 차 있다. 작업실에 도착하자마자 수줍은 인사와 함께 맛있는 커피와 쿠키를 내주는 작가님의 환대에 따뜻함을 느꼈고, 누군가의 쉼이 되어주고 싶다는 작가님의 마음이 더욱 진실하게 다가왔다. 타인의 불안과 슬픔을 보듬을 줄 아는 작가님의 삶을 향한 호기심을 가득 품은 채 대화를 이어 나갔다.
‘밤으로부터 위로가 되어주고 싶다’는 메시지가 따뜻하네요. ‘훈밤’ 소개 부탁해요.
감사해요. 브랜드 이름 훈밤은 제 이름의 첫 글자와 ‘밤’을 붙여서 훈밤으로 지은 거예요. 밤으로부터 위로가 되어주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담았어요. 여기서 ‘밤’은 단순히 시간적인 의미로서의 밤이기보다는 우리가 겪고 있는 힘듦이나, 불안, 우울, 외로움과 같은 감정을 다 포함하고 있어요. 그리고 살면서 힘든 시간을 보낼 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나누기조차 쉽지 않더라고요. 그런 이야기들을 제가 먼저 밖으로 꺼내야겠다고 생각해서 도자기 작품이나 클래스를 통해 하나둘 시도하고 있어요.
도예는 언제부터 했어요?
한국도예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로 지금까지 10년 넘게 도자기를 만지고 있어요. 어머니께서 서양화를 전공하셔서 집에 미술과 관련된 재료가 많았는데, 그것들을 가지고 놀다 보니 자연스레 미술을 좋아하게 됐어요. 그러다 고등학교 진학을 고민할 때 어머니가 미술과 만들기를 좋아하면 도예를 해보는 게 어떠냐고 추천해주셨고, 그렇게 도예를 처음 접하게 됐어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훈정의 마음을 사로잡은 도예의 매력은 뭔가요?
제 손으로 직접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에요. 시간을 투자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것도 좋고요. 얼마나 애정과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완전히 다르거든요. 대충 만들면 다 티가 나서 꼼수를 부릴 수 없는 정직한 작업이라는 것도 하나의 매력이에요. 그리고 가마 안에서 일어나는,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너무 많아요. 그게 단점이라고 하면 단점일 수 있는데, 우연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재미를 느낄 때도 있거든요. 도자기를 하면 할수록 좋아져요.
하나의 도자기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간단히 설명해주실래요?
보통은 물레 작업이랑 판 작업이 있어요. 물레 작업의 경우 두 가지를 흙을 섞어 반죽을 하고 물레에 얹힌 후 형태를 만들어요. 형태가 완성된 것들은 하루 정도 반건조한 뒤 단단해지기 전에 깎아서 형태를 만드는데, 이때 대부분의 형태가 완성돼요. 그다음 완전히 건조한 후 800도의 가마에서 초벌을 하고 사포질을 해요. 그러고 나서 또 한 번 건조하고 유약을 입힌 뒤 1,250도의 가마에서 재벌을 해요. 가마의 경우는 다 채워지면 한 번씩 돌리고 있는데 2주에 한 번씩 40개 정도 만들어져요.
과정이 정말 복잡해요. 이렇게 정성을 쏟는데 생각과 다른 결과물이 나오면 심란할 것 같은데, 그럴 땐 어떻게 받아들이세요(웃음)?
재밌는 게, ‘정말 잘 나왔다!’ 싶은 도자기에 이가 깨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어쩔 수 없으니까 그냥 받아들여요(웃음). 처음 도예를 시작했을 때는 예측불가능한 상황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어서 많이 울었어요. ‘도자기는 왜 이렇게 예민하고, 신경 쓸 것도 많고, 내 마음대로 결과가 안 나오지?’ 생각하면서 스트레스도 받았고요. 그런데 오랜 시간 작업을 하다 보니 모든 게 자연스럽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구나, 그럼 다시 만들어야지!’라고 마음을 먹었고, 삶을 살아가는 데에도 도움이 돼요. 도자기를 하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배웠죠.
이가 깨져서 판매가 불가능한 도자기는 어떻게 돼요?
버리기 아까운 애들은 제가 쓰기도 하는데, 쓸 수 없을 정도로 깨진 거는 그냥 파손하죠(웃음).
모두 수작업으로 만들잖아요. 작업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있나요?
완성도에 대해 신경을 많이 써요. 스스로 100% 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에 가깝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기준을 충족할 때까지 작업해요. 누군가는 형태를 만드는 부분에만 신경 쓰기도 하지만, 저는 도자기의 굴곡이나 눈에 보이는 ‘티’를 사포질로 다 없애거든요. 예를 들어, 잔 같은 경우는 입에 닿는 부분의 라운딩 처리를 최대한 깔끔하게 하고, 누군가 도자기를 만졌을 때 손에 걸리는 것이 없도록 하려고 해요.
실제로 만져보니 촉감이 정말 부드러워요(웃음). 도예는 반복의 연속이잖아요. 힘들진 않아요?
힘들 때도 있어요. 가끔 재미없을 때도 있고요. 반복에서 오는 지루함도 느끼고, 열심히 했는데 예상치 못한 결과물이 나오면 ‘왜 이 고생을 하면서 만들지?’라는 생각도 하고요. 그런데 제 마음에 드는 도자기를 볼 때 뿌듯함과 희열이 있어요. 또 정성을 알아주는 분들을 만날 때 너무 즐거워요. 그렇다 보니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은 욕구도 생기고요. 지금은 도자기가 제 삶의일부예요.
새로운 작품을 만들 때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어요?
주로 자연에서 모티브를 얻는 편이에요. 도자기 전시도 가고, 회화 전시도 많이 보려고 해요. 다양하게 접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를 얻게 될 때가 있거든요.
왜 자연이에요?
제가 쉼을 누리거나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이 숲과 집이거든요. 제가 만든 ‘도토리 찻잔’도 숲을 거닐다 발견한 도토리를 보고 영감을 얻어 만들었고, ‘스노우 요거트 보울’도 눈덩이를 모티브로 만들었어요. 앞으로도 자연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든 작품을 통해 많은 분이 일상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편안함을 누리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어른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클래스도 진행하고 있잖아요. 최근에는 ‘나 탐구하기’라는 주제로 클래스를 모집했어요. 이 주제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몇 년 전부터 내가 나를 모르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많다고 느꼈어요. 한 가지 예로, 다른 작가분들의 인스타그램에 있는 작품이나, 주변에 가끔 함께 작품을 만드는 분들과 제 작품을 비교하다 보니 제가 너무 작아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건 제가 저를 못 믿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때부터 나를 잘 알아야 뭘 하더라도 덜 흔들리고, 더 단단하게 작업을 해나갈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저를 알아가려고 노력했어요.
덕분에 요즘은 많이 단단해진 것 같아요. 예전에는 생계를 위해 작업을 하거나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할 때가 많았거든요. 지금은 80% 정도 재미를 느끼면서 작업을 하고 있어요. 인스타그램에 작업물을 올렸을 때 좋아해 주는 분들이 있으면 자신감도 생기고, ‘내가 잘하고 있구나’ 생각해요.
도자기에 누군가의 이야기를 담아낸다는 점도 흥미로웠어요.
도예 클래스가 워낙 많아서 ‘훈밤’만이 가진 ‘의미’를 찾고 싶었어요. 단순히 만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의미가 담긴 것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그렇다면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건 어떨까?’는 마음이 들었어요. 살다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뭔가를 만들고 나면 애물단지가 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누군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만든 작품이고,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물건이라면 시간이 흘러 다시 볼 때 ‘그때의 나’를 떠올리게 되니까 그 자체로 의미가 있잖아요. 모두에게 특별한 시간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훈밤은 어떤 브랜드로 남고 싶어요?
집처럼 편안해서 자꾸 찾게 되는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도자기뿐만 아니라 뜨개질 모임이나 독서 모임도 함께 하고 싶거든요. 작업실에 편히 쉬어 가고, 새로운 사람들과 마음 놓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무엇인가를 만드는 시간 동안 나를 되돌아보게 되는 시간을 보냈으면 해요.
대화를 나누다 보니 ‘편안함’이 훈정에게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아요. 편안함은 어떤 의미예요?
외부 자극에서 벗어나 아무런 걱정 없이, 나답게 쉴 수 있는 공간이나 사람이 아닐까요?
훈밤이 위로나 쉼이 필요한 분들에게 편안함을 선물하는 공간이 되길 바랄게요(웃음). 앞으로 계획 중인 새로운 작업이 있나요?
올해 숲과 집이라는 주제로 전시를 계획하고 있어요. 자연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치유되는 게 있잖아요. 집도 온전히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고요. 전시를 통해 쉼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보여 드릴 예정이에요. 그리고 앞으로는 지금까지 보여드린 ‘잔’이나 ‘보울’ 이외에 그림 작업이나 입체적인 작품을 통해 ‘편안함’이라는 큰 메시지가 담긴 작업을 계속해나갈 것 같아요. 작품에 대해서 사람들과 함께 소통하고 나눌 수 있는 자리도 많이 만들고 싶고요. 작가로서 성장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OLO MAGAZINE> ‘오피니언’ 코너는 ‘오늘날 잘 입는다는 것에 대한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해 시작됐어요. 오늘날 잘 입는다는 건 뭘까요?
‘나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한때 20대 초반의 모습을 그리워할 때가 있었어요. ‘그때의 나는 긍정적이고 새로운 사람과도 잘 지내는,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지금의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지?’ 하면서 자책과 후회도 많이 했고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이 많이 바뀌잖아요.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의 나는 또 다를 수 있고요. 조금씩 변화해가는 나를 유연하게 잘 받아들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예전과 다르다고 해서 발전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무르고 있는 게 아니니까요. 예전보다 두려움이 많아졌지만, 안정적이고 편안한 것을 좋아하는 지금의 나를인정하면서 잘 살아가고 싶어요. 나답게!
도예 브랜드 ‘훈밤’을 운영 중이다. 수작업으로 만든 도자기 제품 판매 및 원데이 클레스를 진행하고 있다.
첫번째 댓글을 달아보세요!